시대가 바뀌면 기술이 달라지듯 사람들의 성격도 그 결이 달라진다.
먹을 것 하나 건지기 힘든 시절에는 사람들은 입에 풀 한포기 넣기 위해 온 몸에 흙을 묻혔고 그 시절 삶은, 거칠어진 손바닥처럼 투박한 촉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90년대 한국은 생고기를 막 썰어낸 듯 따뜻하고 날것의 열기가 있던 시대였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서로의 삶을 부딪치며 살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마치 도시 전체는 반짝이는 스팟조명이 켜진 것처럼 사람들의 눈동자에도 덩달아 빛이났다.
가슴 속에는 가벼운 풍선 같은 기대들이 떠 있었고 나도 언젠가 떠올라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공기가 퍼져 있었다.
그러다 2010년대가 되자 빛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림자가 더 짙었다.
사람들은 손에 잡히 않는 무언가를 쥐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해보였고 도시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2025년의 지금,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스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가 서로를 이상한 사람인 양 쳐다보다 바람처럼 흩어져 각자의 길로 급히 걸어가며 자신들만의 속도로 사라져간다.
나는 원래 사람 관계를 어려워 하는 편이다.
흔히 말하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강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훨씬 편했고 사회생활이라는 이름 아래 억지로 사람들과 섞여 지내곤 했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남아 있는 몇몇과는 자연스럽게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살아오며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손가락질 받아 마땅할 만큼 악한 사람도 있었고
법 없이도 살 것처럼 순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성격이 이렇게 단순하게 나뉘는 사람은 사실 드물었다.
대부분은 희거 검은 사이, 넓은 회색 지대에 머물러 있다.
겉으로는 좋은 점만 있는 것처럼 보여도 어딘가에 오래 쌓인 먼지를 품고 살고 겉으로는 비열해 보이는 사람조차 가슴 깊은 곳에 작은 놀이동산 같은 따뜻한 동화를 숨겨 놓고 산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여러 개의 가면을 들고 다니고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꺼내 쓰며 하루를 버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란 결국 누구나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채 살아가는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바라보는 나 사이 그 어딘가에 진짜 모습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부터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것이 그저 내 성격의 결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서야 조울증 증세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약을 복용하고 난 뒤 비로소 감정의 파도가 잔잔해졌고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나의 성격이 무엇인지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한 가지에 집중하기 어려워 스스로를 꾸짖곤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노력 부족이라 자책했지만 실제로는 ADHD 증상이 있었다.
약을 먹자마자 머릿속의 소음이 정리되듯 집중이 가능해졌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간의 의지는 때때로 몸이라는 그릇에 발목 잡힌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내향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외향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둘 중 어느 쪽도 완전히 틀리지 않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지만 사회성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을 감추며 지내고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환하게 웃고 떠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는 차갑고 사무적으로 변해버린다.
나는 여러개의 가면을 가지고 살아왔다
때로는 웃는 얼굴을 때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필요에 꺼내 쓰며 하루를 버텼다.
그 가면들 사이에 숨어 있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천천히 찾아가는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더 좋아진다.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예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떤 그들의 선택이 요즘 들어서는 묘하게 가슴 깊숙이 와 닿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과연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일까?
사람이 많은 공간을 피하고 고요한 시간을 갈망하는 내가 어떤 인연과 한 지붕 아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는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자신이 없어지는 기분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면 머리속이 네모난 상자 안에 갇히는 듯한 답답함이 찾아온다.
익숙한 자유가 줄어들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누군가와 맞춰 살아가는 일은 나에게 생각보다 훨씬 큰 용기를 요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럴 때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왜 이토록 공감하는지, 그리고 이 말에 기대어 살아가는 내 모습은 어떤 사람인지 조용히 되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