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팔을 입고 있었다.
팔쪽이 확실히 허전했다.
남방을 찾아 입을까 했지만 이 털이 곤두서 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겨울이었던 날을 몸이 기억해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창문 앞에 보이는 벽 색깔이 회색빛인데 오늘 날씨도 그에 못지 않게 회색이다.
영국 날씨처럼 우울한 이런 날 마음이 흥겨워지는 노래를 듣는다.
축 깔리는 음악이 어울리는 날씨지만 내 기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음악을 틀지 않았다.
비가 온다고 꼭 우울한 건 아니지만, 이런 날이면 괜히 놀이동산 소풍이 떠오르고 솜사탕처럼 가볍고 달달한 게 먹고 싶어진다.
요즘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노안이 온거 같다.
처음 안경점에서 렌즈를 맞추고 나오던 날, 세상이 또렷해진게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또렷함이 불편했다.
내가 이제 안경 없이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됐다는 걸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이럴 적에는 아무것도 끼지 않아도 세상이 선명했다.
그 선명함이 당연한 줄 알았다.
당연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진다는 걸 안경 하나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이 회색으로 보이니 안경을 닦았다 썼다를 반복한다.
안경을 닦는다고 컬러풀하게 보이지 않을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밝은 게 보고 싶은 마음에 힘을 주어 닦아본다.
예전처럼 맑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닦는 것이다.
다시 선명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닦는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회색빛이고 안경알은 윤기가 날 정도로 화창해졌다.
저 창문의 풍경을 몇 번이나 봐왔던가.
손바닥보다 큰 낙엽이 벽에 붙어 그림처럼 남아 있던 때도 있었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뜨겁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던 곳.
보이지도 않을 미세 먼지가 천천히 스며드는 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아무날도 아닌 오늘 같은 날도 날씨 하나만으로 특별해지는 걸 보면 하루하루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구나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