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가 감추고 싶었던 야망, 브랜드 '아마티'.

영원한 상처로 남다

by 정영훈


1980년대부터 마쓰다는 일본과 호주 등의 시장에서 오토잠, 유노스, 앙피니 등 여러 배지를 사용하여 다른 딜러점을 통해 판매시키는 배지 엔지니어링 전략을 사용했었습니다.



'오토잠' 브랜드는 주로 소형차, 즉 일명 'K-카'라고 불리는 차량들과 리브랜딩화된 스즈키의 차량들을,

'앙피니' 브랜드는 고급 차량과 스포츠카인 'RX-7'을,

1996년 앙피니와 통합되기 전까지 앙피니와 비슷한 차종들을 판매하던 '유노스' 브랜드,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단 4년 동안만 운영되었으며 주로 바디킷과 같은 차량 부품의 개발과 생산을 맡았던 'M2'까지,



당시 이러한 전략을 사용했던 이유는 도요타, 닛산, 혼다 등 다른 여러 일본 제조사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시장 경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케팅은 1991년 일본 버블 경제의 붕괴로 인해 1990년대 중반에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요, 거기에 유노스 차량들 중 일부는 다른 브랜드로 팔려나갈 예정이었으나 붕괴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오늘 알아볼 브랜드는 그 무산된 차량들이 담긴 마쓰다의 배지 엔지니어링 브랜드 중 하나, '아마티'입니다.






-아마티의 탄생배경-






리 아이아코카


1973년, 석유파동 이후로 시장의 주요 차량이 작고 경제적인 자동차로 전환됨에 따라 1970년대 미국에서는 일본 자동차의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주요 제조업체인 'GM', '포드', '크라이슬러', '아메리칸모터스(AMC)' 등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기에, 그들은 처음으로 일본 제조업체에게 시장 점유율을 밀리기 시작했는데요,

10년이 끝날 무렵 '포드', '크라이슬러', 'AMC'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고, 생존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크라이슬러'는 '리 아이아코카' CEO가 미국 의회로부터 20억 달러 상당의 대출 보증을 협상하는 등의 정부 구제금융을 요청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그의 노력은 성공적이었고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법률로 서명한 '크라이슬러 대출 보증법'은 회사를 파산으로부터 구했습니다.

프랑스 자동차 회사인 '르노'는 'AMC'를 구출하고 1980년에 회사의 대다수 지분을 매입했으며 미국 정부는 이후 국내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

1981년 5월 '로널드 레이건' 신임 대통령은 일본 정부가 연간 168만 대의 자동차를 자발적으로 미국에 수출하는 것에 동의하도록 했습니다.​​



이 같은 규제가 시행되면서 일본의 주요 자동차업체들은 사업 전략을 조정했습니다.

대량으로 저가의 경제적인 차량들을 수출하는 대신, 미국 내 새로 지은 공장에서 저가의 모델들을 생산하면서 제한된 할당을 이용해 고가의 차량들을 수출하려 하였고,

일본에서의 고급차량 수요 증가는 이러한 조정을 도왔기에 주요 자동차 회사들 간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습니다.


어큐라 (좌), 인피니티 (우), 렉서스 (하)






-아마티의 개발 과정-







'마쓰다'는 '토요타'와 '닛산'보다 훨씬 규모가 작고 자원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의 세 번째로 큰 자동차 회사가 된다는 목표로 1980년대 후반 공격적인 확장 및 다양화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오토잠', '유노스', '앙피니' 브랜드를 출시하고 'M2' 자동차 부서도 제작하면서 자신들의 경쟁 업체들이 미국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을 본 마쓰다는 1988년 '프로젝트 페가수스'를 시작하며 미국을 겨냥한 고급 자동차를 자체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쓰다는 미국 시장에서 크게 도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 '마쓰다 미아타'의 놀라운 성공은 브랜드의 이미지를 더욱 크게 구축하였고, 1989년, '프로젝트 페가수스'는 '딕 콜리버' 중역이 맡으며 아마티 부서로 확장되었습니다.



마쓰다가 고급 부서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은 1990년부터 계속되었고 마쓰다는 이를 격렬하게 부인했는데요, 하지만 1991년 8월 기자 회견에서 결국 이 사실을 인정하며 '아마티' 브랜드를 1994년 봄에 출시하기로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마쓰다는 '아마티'라는 이름이 라틴어 표현 중 "사랑하기 위해"라는 뜻이라고 공개하였고,
캐시미어에 닿은 손가락 끝의 섬세한 느낌, 잘 익은 사과 타르트, 할머니의 오븐에서 구워지는 추수감사절 칠면조 구이의 향기 등 여러 가지 느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도 하였습니다.



아마티 브랜드로 출시하려던 차량들은 1992년 초 호푸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했으며 그 해 말에 일본 및 국제 시장을 위해 출시된 '유노스 500' 세단을 미국식으로 개조한 '아마티 300'과,​​

슈퍼차지 밀러 사이클 엔진과 4륜 조향 시스템이 장착되고 1993년 일본과 국제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출시된 '아마티 500', 그리고 아마티의 대표작, '아마티 1000'이 준비되었습니다.






-'아마티', 그리고 배지 엔지니어링 브랜드들의 몰락-






하지만 1991년 8월, '아마티' 브랜드가 대중에게 발표된 직후, 일본 버블경제가 붕괴되며 1992년 초까지 일본 경제는 오랜 기간 동안 침체되었고, 이 기간은 후에 '잃어버린 10년'으로도 알려졌습니다.

같은 시기 미국의 경제는 걸프전의 여파로 인해 심각한 불황에 빠져 고급 자동차 시장은 더욱 침체되었는데요,

일본 경제가 자유낙하하면서 자동차 판매가 급감함에 따라 마쓰다는 자신들의 브랜드들을 너무 과도하게 확장시켜 유동성이 부족하다고 판단, 자신들이 출시한 모든 차량들의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쓰다는 이미 적어도 500억 엔 (약 5000억 원)을 투자한 '아마티' 프로젝트에 지원을 줄여나갔으며 '콜리버'가 '아마티' 브랜드 개발을 취소하였을 때는 이미 '아마티 1000' 생산에 필요한 5천만 달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회계 연도 말에 적어도 3분의 2의 이익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마쓰다는 1992년 10월 20일 '아마티' 브랜드의 개발이 취소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모터스포츠에 대한 투자의 큰 감소를 발표하였고, 이는 1991년 마쓰다가 '787B'로 24시간 르망 레이스에서 우승을 한 다음 해였습니다.


아마티의 브로셔


당시 아마티 부서가 판매할 계획이었던 차량 중 2대는 이미 일본 및 국제 시장에서 생산을 하기 위해 준비가 마쳐진 상태였고, 아마티 1000의 프로토 타입은 테스트하고 있던 상태였으며,

호푸 공장은 아마티 V12 엔진을 제작할 준비가, 그리고 67개의 딜러점은 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한 계약이 되어있던 상태였습니다.

마쓰다는 브랜드 마케팅 캠페인을 만들기 위한 캘리포니아 광고 회사인 'Lord', 그리고 'Dentsu & Partners'와 계약하며 6천만 달러를 예산으로 책정했었는데요, 마케팅 자료와 브로셔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며, 그중 몇 종류는 이미 언론에 공개된 상태였습니다.



'콜리버'는 '아마티 프로젝트'의 거의 모든 직원을 해고하며 1994년 은퇴를 하였으며, 마쓰다 지분 24%를 소유한 '포드'는 1995년 마쓰다에게 자본을 더 투입하기 위해 12%를 추가로 매입했습니다.






-아마티의 몰락, 그 이후 -







마쓰다는 1992년 10월 기자 회견에서 취소를 발표한 이후에도 계속 아마티 프로젝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아마티는 마쓰다가 부끄러워하는 "개방된 상처 " 로 불리어집니다.

히로시마에 있는 마쓰다 박물관과 캘리포니아에 있는 기록 보관소에도 '아마티 프로젝트'에 대한 물품이나 언급이 없으며,

현재는 오래전에 배포된 몇 개의 스파이 샷과 렌더링 사진들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마쓰다 유럽에서 치프 디자이너로 활약한 영국 디자이너 'Peter Birtwhistle'의 아마티 차량 렌더링과 스케치들.
W12엔진이 장착될 예정이었던 아마티의 프로토타입 차량, '프로젝트 A007'


아마티 브랜드로 고급화 전략이 실패된 기존 차량들은 '제도스'라는 네이밍으로 임원용 차량으로써 판매되거나 기존 네이밍인 '마쓰다 밀레니아'로서 판매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아마티'에 관한 정보는 거의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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