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을까
뮌헨에서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리나는 가끔 여성의 집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입소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었는데, 아이를 갖게 되자 우선 입소 허가를 받았다. 처음 그곳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특히 밤에 주로 활동하던 그녀에게는 정해진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몇개월 시간 규율을 지키며 지내다 보니 기상 시간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고, 취짐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필리핀에서 야간 업소 가수로 일했다. 그곳에 기타 연주자로 온 독일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를 따라 독일로 왔다. 함께 살기 시작한 첫 몇 달은 나름 평온했다. 그러나 남자의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직업 특성상 해외 출장이 잦았던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다른 나라에서 만난 더 어린 여성들과도 쉽게 관계를 맺었다. 그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에 이름을 검색하면 기사와 공연 영상이 나오는 비교적 알려진 기타 연주자였다. 외모도 준수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그에 비해 그녀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진한 화장과 의상을 갖추었을 때에만 돋보였다. 노래 실력 또한 특별히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 붙잡고 있던 무대를 한번 떠난 뒤, 다시 설 자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사랑은 채 일년도 되지 않아 식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다른 여성들을 만났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녀는 집을 나와 맥도날드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남자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와 함께 그녀가 일하는 매장을 찾아왔다.
"이곳은 너와 정말 잘 어울리는군. 지금 입은 유니폼이 네가 예전에 입던 그 화려한 옷들보다 보기 좋아.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네. 축하해."
남자는 새 여자친구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비꼬듯 말했다. 그녀는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날이 그와 만난 마지막이었다. 이후 그는 더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 남자의 사랑을 잃은 그녀에게는 돌아갈 이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바꿔줄 또 다른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한 번 운명처럼 사랑을 따라 독일까지 온 그녀에게, 두번째 인연을 기대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여겨졌다. 두 번째 기회도 쉽게 찾아오는 듯 보였다. 옷가게에서 손님으로 만난 남자와 관계를 맺었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 한동안 함께 살았다.
남자가 예측하기 어려운 폭력성을 드러나기 전까지는 비교적 평온했다. 남자는 그녀와 뱃속의 아이를 위해 자주 요리를 했고, 식탁을 정갈하게 차렸다. 그때마다 그녀는 정성 어린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사소한 말다툼 끝에 상황은 급변했다.
싱크대를 등지고 앉아 있던 그에게, 그녀는 싱크대 서랍에 있는 포크 하나를 건네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그 말이 어떤 지점을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무 설명도 없이 식탁 위의 그릇들을 두 팔로 거칠게 밀어냈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엎어지거나 깨지면서 바닥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는 이내 흥분으로 얼굴을 붉힌 채 식탁을 뒤엎었다.
"내가 만만해 보이냐. 네가 뭔데 나한테 포크를 가져오라 마라야."
그가 무엇에 그토록 분노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앉은 채 어쩔 줄 몰라하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음날, 짐을 챙겨 그의 집을 나와 여성의 집으로 향했다.
리나는 전셋집을 구하기 전까지 여성의 집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가끔 그곳에서의 시간을 비교적 따뜻한 기억으로 떠올렸다. 함께 지내던 여성들과 도시락을 싸 소풍을 갔던 일, 숙소에 둘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던 일,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쿠키를 만들던 일들을 담담히 이야기하곤 했다.
여성의 집은 주로 가정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여성들이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머무는 임시 공간이다. 가해자인 남편이나 부모의 추적을 막기 위해 주소는 철저하게 비공개로 유지된다.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을 혼자 키운다는 전제 아래, 여성 보호소는 나의 첫번째 선택지였다. 리나가 건네준 연락처로 입소 상담을 받았지만, 뮌헨의 보호소는 이미 정원이 차 있었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더라도 입소까지 최소 2년에서 3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두번째 선택지는 사회급여 수급자나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공공임대주택이었다. 보호소가 원칙적으로 육개월, 최대 2년까지 허용하는 임시거주지인 만큼, 결국 월세가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이 나와 아이들의 장기거주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부모 가정은 자녀 수가 많을수록 입주 심사에 유리하다고 하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아이들과 살 적당한 집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회급여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고 노동에 대한 책임 없이 하루를 보내거나, 술에 의존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이웃들이 많다는 점을 떠올리며, 아이들이 그런 환경 속에서 맞이할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 아이들과 소박한 저녁을 먹고, 소파에 고단한 몸을 기대어 잠시 텔레비전을 보다가 씻고 잠자리에 드는 평범한 일상.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그려왔던 어른의 삶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일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는 하루, 예측 가능한 내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 소냐가 떠올랐다.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청소년청에서 일하는 소냐. 그녀처럼 사는 삶이라면, 그녀 같은 엄마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너무 쉽지도, 그렇다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어렵지도 않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어려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복지학과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영문 성적증명서와 졸업증명서를 공증받아 우니 어시스트를 통해 아비투어 점수를 받았다. 그 점수로 뮌헨 전문대학에 지원해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입학 등록을 하던 날,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등록을 마치고 임시 학생증을 받은 뒤, 아이와 함께 학생식당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 순간,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간 끝에서, 아주 옅은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누군가가 내게 건네준 구원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