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들
상담사로 일하다보면 죽음을 자주 접하게 된다. 고객들의 구직 활동을 돕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들의 사생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이전에 일년 이상 직업 활동을 한 실업자들은 노동청으로부터 실업급여를 받는데, 제공된 구직 프로그램에 등록하지 않거나, 등록 후 정기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급여 삭감이나 박탈 같은 불이익을 받는다. 그래서 프로그램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그 사유를 증명해야 한다. 문제는 그 증명이 때로 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산소 마스크를 낀 채 호스피드 병동에 누워 있는 가족의 사진, 막 장례 의식을 치르는 가족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전송되어 오기도 한다.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면 굳이 보지 않아도 되었을, 죽음을 적나라하게 암시하는 장면들이다. 그 안에서 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통이나 슬픔, 절망을 본다. 동시에,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암흑 같은 회한과 허무를 읽는다. 한동안 그 모든 장면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청소년청에서 일하는 소냐 역시 그런 고통을 토로한 적이 있다. 특히 아이를 책임지지 못해 대부분 타의로 위탁시설에 맡길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남편의 외도로 가정이 파탄나 하루 아침에 생계를 떠맡게 된 여자, 이혼 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알코올에 의지하게 된 여자, 아이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책임질 수 없는 여자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다는 이웃의 신고로 찾아간 집 안에 고스란이 남아 있는 혼란과 좌절의 흔적.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아 배어든 퀘퀘한 곰팡이 냄새. 살아있는 사람들이 분명 숨쉬고 사는 곳에서 맡아지는 죽음의 냄새들. 소냐는 그들 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겹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학 시절, 고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밤중에 잠결에 화장실에 가다 욕실에서 넘어졌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엄마와 고모의 관계가 어떤 이유로 틀어진 뒤, 왕래가 끊어진 지 십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어렸을 적, 엄마는 종종 고모에게 나와 동생 편으로 음식을 보내곤 했다. 엄마가 차비로 준 돈을 아끼려고 우리는 고모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몇 번이나 찻길을 건너고, 사람 드문 허름한 골목을 지나, 모양이 비슷한 집들 사이를 오래 걷다 보면 파란 대문이 달린 집이 나타났다. 그 집의 반지하 방이 고모의 집이었다.
고모는 낮에도 어린 사촌 동생과 함께 늘 잠자고 있었다.
낮에도 열려 있던 파란 대문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녹슨 작은 철문을 두드리면, 고모는 부스스한 머리에 생기 없는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음식 보따리를 들고 서 있는 우리를 보며 그녀는 엷게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했던 방에 불을 켜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텔레비전 소리와 사촌 동생의 울음, 옹알이, 우리가 내는 작은 소리들이 방 안을 채우는 동안 고모는 쌀을 안치고, 국을 끊였다. 밥이 되는 동안 우리는 사촌 동생과 놀았고, 고모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밥이 다 되면 우리가 가져온 반찬을 함께 올려 상을 차렸다. 우리는 한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그 시간만큼은 지하방의 눅눅한 공기도, 벽에 내려 앉은 그늘도 조금은 옅어지는 듯했다.
고모가 부엌에서 상을 치우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슬그머니 일어나 작별 인사를 했다.
"더 있다가 가. 아직 해도 안 졌잖아. 고모부 곧 와. 그때까지만."
고모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두려운 얼굴로 우리를 붙잡곤 했다.
그때의 나는 고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모는 늘 잠만 자고, 우리가 와야 마지못해 일어나 밥을 하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여겼다. 우리가 돌아가면 다시 편히 쉴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붙잡는지 알 수 없었다.
고모는 파란 대문 앞까지 나와 어린 사촌 동생을 안은 채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가 그리워했던 것이 사람의 온기였다는 것을, 게을러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늘 그녀에게 빚을 진 듯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엄마가 준 돈으로 얼른 과자를 사 먹고 싶어 고모부가 올 때까지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일. 우리가 다녀감으로써 겨우 되살아난 생기를 다시 앗아가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고모의 외로운 죽음에 대한 자책을 털어놓았을 때, 저명한 작가였던 한 교수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마."
그 특별하지 않은 말은 이상하리만치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덕분에 고모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느덧 나도 고모가 세상을 떠났던 나이가 되어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모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더 사랑하고 싶어졌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지금껏 나를 다른 사람만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무 살에 울고 있는 나를 안아주지 않은 것, 서른 살에 절망하던 나에게 모진 생각으로 상처를 준 것, 마흔 살에 지쳐 있던 나를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느냐고 몰아붙인 것, 괜찮다고, 충분히 애쓰고 있다고 말해 주지 못한 것. 오랫동안 보지 못지 못했던 고모의 죽음에조차 죄책감을 느꼈던 나는, 왜 정작 자신을 위로하는 법은 몰랐을까.
초로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 나에게, 이제서야 비로소 말해본다.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럼에도 여기까지 살아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