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사회복지사가 되었을까
“지영씨. 지영씨는 꼭 원하는 일을 해.”
사회복지학과 졸업 논문을 쓰던 때였다. 독일에서 여러 해를 살고 대학 공부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독일어가 서툴렀다.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능숙한 외국 학생들을 보면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그들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숙사나 학생 동아리 등에서 독일어를 쓸 수 있는 환경에 노출돼 있고, 나는 집에서 아이들과 한국어만 쓰니 그런 것이라는 변명을 찾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보잘것없는 독일어 실력으로 어떻게 마지막 학기까지 왔는지 의아해하곤 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발음이었다. 특히 R 발음은 마치 가글하듯 혀 뒤쪽에서 목젖을 울려야 했고, 단어 위치에 따라 달라졌다. Ö와 Ü는 한국어에는 없는 소리로, ö는 어와 에 사이, ü는 ‘이’처럼 발음하면서 입술은 ‘우’를 만들어야 했다. 발음 교정 수업을 몇 번 들어도, 익숙한 혀는 한국어 방식으로 고집스럽게 움직였다.
논문 주제는 우울증에 걸린 여성들에게 명상이 미치는 영향이었다. 심리치료 관련 독일어 서적은 생소했고, 사전에서 찾은 단어가 문장에서 어떤 의미인지도 헷갈렸다.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이 맞는지, 다른 사람이 내가 쓴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지 검증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사람, 내가 쓰고 있는 논문 주제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논문을 쓸 당시, 코로나의 여파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관련 서적을 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주변에서 도움을 줄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대학의 사회복지학과는 보통 유치원 정교사나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높이기 위해 직업 활동과 병행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 공부만을 주업으로 하는 대학생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젊은 날의 끈끈한 공동체 의식도, 여유도 없었다. 사회학과 공부를 위해 유학 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소속 외국 학생들이라고 해도 독일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 학과에는 외국 학생을 돕는 문화나 시스템이 거의 전무했다.
이런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지영씨, 제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그 애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나랑 가깝게 지냈거든요. 지금은 한국에 들어가 있는데, 제가 지영씨 논문 쓰는 것을 좀 도와줄 수 있냐고 하니까, 자기는 그 정도 실력은 안 된다면서 옛날 독일에서 같이 살던 남자친구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대요. 아마 그 친구가 지영씨한테 연락할 거예요.”
건너건너 아는 사람을 통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논문 신청은 이미 완료된 상태였고, 신청일로부터 여섯 달 안에 완성된 졸업 논문을 제출하지 못하면 졸업은 불가능했다. 독일에는 삼진아웃 제도가 있어서, 한 과목에 낙제점 5를 세 번 받으면 대학에서 퇴출된다. 같은 주에서는 그 학과를 다시 들어갈 수 없고, 다시 들어가고 싶으면 다른 주로 가야만 한다. 졸업 논문도 신청 후 6개월 안에 제출하지 않으면 졸업하지 못한다.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과목 시험과 달리, 논문은 한 번에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문 신청을 신중하게 해야 하며, 낙제점을 면하기 위해 논문 작성에도 공을 들여야 했다. 표절에 엄격한 독일에서는, 주석을 달지 않고 참고문헌을 베껴 쓰거나 다른 학생이 제출한 논문과 유사성이 밝혀지면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 대학 논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동안 대학 공부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내가 논문을 신청하고 얼마 후, 코로나가 닥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졸업하려면 졸업 논문을 통과해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무조건 잡아야 했다.
그녀의 아는 동생은 선천적 장애로 다리를 절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해내며 살아가는 여성이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자신처럼 몸이 불편한 남성과 사귀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 둘은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몇 달 전 헤어졌다. 서로 절절히 사랑했는데, 왜 헤어졌는지 그녀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너무 사랑해서 그들의 장애가 서로에게 짐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서로의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헤어짐을 결정했을 거라는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지만, 그렇게 이타적인 사랑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의 부탁이었으니, 남자는 곧바로 적극적으로 내게 연락을 해왔다.
“일단 지금까지 쓰신 논문을 보내 주세요. 얼마를 줄지는 나중에 이야기하죠.”
도와준다는 말을 당연히 무료라고 생각했던 나는, 나중에 보수를 협의하자는 그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곧바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 돈을 주고 도움을 받을 거라면, 꼭 그가 아니어도 된다고, 보수를 받고 논문을 도와주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약간 원망하듯 항의하듯 말했다.
언니는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그가 정말 돈을 원한다면 자기가 보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지영씨, 근데 제가 며칠 있다가 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망설이며 급하게 잡힌 수술 일정을 알려줬다. 병원 진료 예약을 잡기 어려운 독일에서 며칠 후에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것은 그만큼 수술이 다급했다는 의미였다. 절대 좋은 징조일 리 없었다.
“수술이 급하게 잡혀서 준비할 것도 있고, 입원도 해야 해서 좀 바쁠 것 같아요. 동생한테 연락은 해 보겠지만, 혹시 연락이 안 되면, 걱정 말고 일단 도움을 받아요. 돈은 내가 그에게 나중에 보내주면 되니까.”
이 상황이 뭔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돈을 요구하는 것이 파렴치한 일이라도 되는 양, 교묘하게 비난하며 은근히 그녀를 압박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단지 도움을 주고 싶어했던 사람이 마치 빚진 사람처럼 양해를 구하고, 관계가 어긋날까 봐 섣불리 반박하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암이래요. 며칠 전 산부인과에서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자궁암 같다고 했어요.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암이 상당히 진행돼 급히 수술 날짜를 잡았어요.”
순간 엄청난 충격에 말문이 막혔다. 며칠 전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그 충격과 두려움을 감당하기에도 벅찬데, 고작 논문 수고비 따위로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굴고 있는 나를 달래고 있는 건가.
“죄송해요. 제 논문은 신경 쓰지 마시고, 수술 잘 받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돕겠습니다.”
그녀는 암 수술을 앞둔 사람 같지 않게 차분한 말투로 나를 격려했다.
“지영씨.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녀의 혼란과 고통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까 봐 털어놓기를 망설이거나 숨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말할 수 없는 부끄럼과, 무엇을 향한 건지 분명하지 않은 혐오감이 몰려왔다.
그날 남자는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돈을 받지 않고 내가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성심껏 도와주겠다고 했다. 예전에도 졸업논문을 쓰는 유학생들을 가끔 무료로 도와줬고, 자신의 생활이 방해받지 않을 적당한 선에서 도와줄 테니 부담 갖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학 동기와 의사로 일하는 이웃집 독일 여자의 도움을 일부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 남자 덕분에 시간에 맞춰 논문을 제출하고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녀로부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어느 날 한 음식 포장 가게에서 오징어덮밥을 포장해서 그녀의 집 근처 공원 벤치에서 같이 먹었는데, 그녀는 얼마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나한테 맞추려고 오징어덮밥을 시켰는데, 속에 부담이 가 먹기 힘들다고 했다. 평상시에는 죽이나 계란찜처럼 부드럽고 속에 부담이 가지 않는 음식을 주로 먹는다고 했다.
그 이후에도 내가 취직될 때까지 몇 차례 그녀의 집이나 그녀의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났다. 어느 날은 그녀가 암 치료를 중단하고 식이요법 등을 통한 자연치료를 선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책에서 읽은 자연치료 요법과 성공 사례를 이야기하며, 암 극복에 대한 희망을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암 수술 후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추적 검사에서 더 이상 종양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자연치료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이대로 5년만 지나면 안심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며,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그 속에 그녀의 삶에 대한 열정과 진심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나를 응원했는데, 내게 마음을 썼는데.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되돌려주지 못한 그녀의 진심이 슬퍼서, 그녀의 마지막을 외면한 나의 사람답지 못함에 화가 나서, 끊임없이 그녀와 나의 시간을 돌려 그녀의 마지막을 되새겼다. 후회라는 부질없는 감정을 놓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서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격렬한 감정들도 사그라들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잊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잊지 못할 것이 두려웠는데, 이제는 다 잊어버리지는 않았음 좋겠다. 그것이 그녀에 대한 내 마지막 예의인 것 같아서.
내 그리운 이여, 우리 다시 만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