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가 보낸 편지
1828. 11. 빈
훌처가 베토벤의 현악4중주를 들려주고 간 이후 슈베르트는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절친한 친구들인 슈파운, 라흐너, 바이에른 펠트도 슈베르트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듣고 다녀갔다. 슈베르트는 슈빈트를 꼭 보고 싶었지만 멀리 뮌헨에 있어 보질 못했다.
매독 3기에 접어든 슈베르트에게 장티푸스는 치명적이었다. 그런대로 버티던 체력도 급격하게 나빠지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증상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바이에른 펠트가 왔을 때는 새로운 음악, D장조(10번) 교향곡에 대해 이야기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슈베르트는 11월 17일부터 엄청난 고열과 격렬한 착란 증세를 보이더니 18일에는 환각 상태에 빠졌다.
슈베르트 :
“제발 나를 내방으로 데려다줘.
여기 땅 밑 구석에 나를 내버려 두지 마.
죽은 사람도 아닌데 땅 밑이라니...
그리고 여긴 베토벤이 없잖아...”
11월 18일 저녁, 환각 상태에 빠지고 병자성사를 받은 천재 작곡가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19일 향년 31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슈베르트의 공식 사인은 “신경열”이었다.
11월 20일 슈베르트의 장례 절차가 마련되었다. 원래 그는 마츨라인스도르프에 묻힐 예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으면 베토벤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과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그의 안식처는 베토벤이 영면한 베링 공동묘지로 변경되었다. 물론 이를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명의 젊은 작곡가를 거장 베토벤 곁에 묻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50년, 100년 후에는 베토벤에 견줄만한 대작곡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고, 끝내 뜻을 관철시켰다.
장례미사는 마르가르덴 성당에서 집전되었다. 친구 쇼버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상여 옆에서’라는 시를 급하게 지었다. 이 시는 1817년 역시 쇼버의 시였던 ‘평화가 그대와 함께하기를’에 붙인 가곡의 선율에 그대로 노랫말을 얹을 수 있게 지은 것이었다. 이 노래는 성 요제프 성당 소속의 합창단이 노래했다.
장례미사가 끝난 후, 관은 베링 공동묘지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슈베르트는 베토벤 묘지 네 칸 옆에 안장되며 영면에 들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바이마르의 겨울 저녁. 괴테는 문하생으로부터 낯선 리트 한 곡을 건네받았다.
문하생 : 선생님, 빈의 슈베르트라는 작곡가가 예전에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마왕(Erlkönig)’입니다.
'마왕'은 슈베르트가 18살의 나이에 괴테의 동명 발라드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이 곡은 낭만주의 가곡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괴테의 극적인 서사와 슈베르트의 풍부한 음악적 표현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다.
괴테는 고개를 들었다. 그 시는 괴테와 친했던 작곡가 젤터도 작곡한 적이 있었고, 여러 작곡가가 시도한 바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가 울리는 순간, 괴테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폭풍 같은 왼손, 달리는 말발굽처럼 몰아치는 반주. 숨 가쁜 선율 속에서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와 아버지의 절망, 마왕의 유혹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동시에 살아났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괴테 : … 이런 해석은 처음이군.
괴테는 문득,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빈에서 보내온, 낯선 악보 묶음. 수많은 시들에 곡이 붙어 있었고, 그 청년은 자필로 ‘존경하는 괴테 선생님께’라는 짧은 메모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읽지도 않고 서랍에 넣어두었었다. 그의 이름은 프란츠 슈베르트. 그 청년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살아 있었다. 괴테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괴테 : 이제야 내 시가 목소리를 가졌군. 나는 단지 단어를 나열했을 뿐인데, 슈베르트… 그대는, 나의 시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은 작곡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