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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미 Jan 01. 2018

도덕경 연재를 시작하며

제1장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격변의 시기였던 2017년 1월. 25년만에 다시 도덕경을 읽고 싶어졌다.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으로 촛불을 밝히러 나가는 생활을 반복하며 나는 매일 한 장씩 도덕경을 읽고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그렇게 써내려간 도덕경은 단 하루를 쉬지 않고 이어져서 제 19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발표되는 2017년 5월 9일에 연재를 마쳤다.      


도덕경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가 살아가야할 마땅한 길이고 무엇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덕인지 근본부터 다시 헤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땅함을 잃어버린 채 소용돌이치는 세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고 있는 우리 세대들. 작은 촛불 하나 밝혀서 세상의 길을 열어보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함이 있지만, 그 결과는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밝혔던 촛불 하나


그때였다. 25년 전 22세에 한문강독 동아리에서 함께 읽었던 노자 “도덕경”이 생각났다. 그때 우리가 교재로 삼았던 것은 23세로 요절한 천재학자 왕필(226~249)의 주석이 달린 <도덕경>이었는데, 희한하게도 내가 도덕경을 읽은 나이와 왕필이 죽은 나이가 엇비슷하다는 점이다.      


22세의 젊은이가 도덕경을 읽은 이후, 25년만에 47세의 중년이 되어 다시 도덕경을 읽어내려가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왕필의 주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왕필은 23세에 죽었으니 노자주를 쓴 것은 그 이전일 것이다. 즉 이십대 갓 초반의 젊은이가 써내려간 주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소년출세하여 입신양명하였던 왕필이 어떻게 이 세상의 흙투성이 속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겠단 말인가? 더욱이 태어날 때부터 늙었고, 오래 살고 오래 살아서 그 이름이 “노자(老子)”였던 현자의 지혜에 대해 스물두어살 먹은 젊은이가 이러니 저러니 주석을 달아놓은 형상이 영 걸맞지 않았다.      


노자 번역서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도올 김용옥 선생의 “길과 얻음”은 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책이긴 하지만, 81일간의 연재를 통해 다양한 번역서들을 참조하고 비교해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나의 노자 도덕경 읽기의 기조는 “내 맘대로 읽는 노자 도덕경”이 되었고, “미친척 하고 시작해본다”가 되었고, “왕필이 스물 세 살에 뭘 알았으려나”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81일간의 연재는 대통령 탄핵심판과 판결, 최순실-정유라 국정농단, 세월호 인양, 대통령선거라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어져갔는데, 그 과정에서 늙디 늙은 노자 선생이 시공간을 넘어 전해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고 우리의 이 여정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노자의 말마따나 돌이켜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역사의 소용돌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어지고 있다. 특히 40대를 넘긴 중년들에게 지워진 짐은 점점 더 무겁게 다가오기만 한다. 직장인들은 이제 승진을 꿈꾸기보다는 정년퇴직만을 바라지만 오히려 명예퇴직으로 내몰린다. 그나마 돈이 없어서 명예퇴직을 시킬 수 없는 회사에서는 은근한 압력과 괴롭힘으로 스스로 퇴직하도록 코너에 몰아세운다. 어쩔 수 없이 퇴직을 하고 자영업자로 내몰리게 되면, 갑작스레 몰아닥치는 세파에 충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쫓아서 허덕이며 살아온 우리들의 모습은 공자가 뿌리깊게 내린 “입신양명”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동양적 성공모델이 낳은 결과다. 공자는 스스로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춘추시대의 각 나라를 주유하며 자신의 통치사상을 설파하였지만 결국 아무런 자리도 얻지 못하였다. 

     

이런 행보를 하고 있던 공자가 주나라 낙읍에서 우연히 노자를 만나게 되어 가르침을 얻고자 하자 노자는 공자를 향해 쓴소리를 남긴다.      


"당신이 말하는 옛날의 성인도 그 육신과 뼈다귀가 이미 썩어서 지금에는 다만 그 말한 바를 남겼을 뿐이오. 군자는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는 귀한 몸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오.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간직하여 밖에서 보기는 공허한 것 같이 보이지만 속이 실하고, 군자는 풍성한 덕을 몸에 깊이 갖추어 우선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 같이 보이지만 사람됨이 충실하다고 들었는데, 당신은 몸에 지니고 있는 그 교만함과 산만한 생각 따위를 다 버리시오. 그런 것은 당신을 위하여 아무런 이로움이 없는 것이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이것뿐이오" - 《사기》 노장신한열전   

  

그래서, 우리는 도덕경을 우리 멋대로 읽어야 한다. 유교적 잣대를 들이댄 왕필의 주석 따위는 잊어야 한다.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갖고 맺힌 곳 없이 자유로웠던 노자의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노자의 가르침이 세상의 탐욕스러운 통치자들에게 외면당했을지는 모르지만, 노자는 유연하고, 겸손하고, 부드러워서 오래오래 살았고, 그 가르침은 물처럼 흘러서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록키산맥 만년설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은 겸손하여 아래로 흘러내려서 호수가 된다. 


<노자 도덕경 1장>     

道可道,非常道;

세상에 허다한 약장수들이 "이게 도야!"라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장황하게 떠들어대는데, 

그렇게 떠들어 대는 순간 도가 아닌 걸?

名可名,非常名.

세상에 허다한 명분쟁이들이 보란듯이 명함을 내밀면서 

"이게 내 이름이야"라고 말하지만, 

글쎄 그 자리 언제까지 가려나?

無名,天地之始;

사실 하늘과 땅의 첫 시작에는 어디에도 이름이 없었어.

有名,萬物之母.

만물의 어미들이 아이들을 줄줄이 낳아놓고서야 

헷갈리지 않으려고 이름을 붙였지.

故常無欲以觀其妙,

그런 까닭에 항시 뭘 억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어야 

세상 진리의 오묘함을 볼 수 있고,

常有欲以觀其徼(순행할 요)

항시 뭘 억지로 열심히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결국 내뜻따윈 상관없이 일이 돌아가는 이치를 보게 되는 법.

此兩者同出而異名.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본래 출생이 같고 이름만 달라. 

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아니야. 

같이 붙어 다니는 것들이지.

同謂之玄, 玄之又玄,衆妙之門.

물론 서로 성질은 전혀 다르지.

굳이 두 가지를 한 이름으로 부르자면 

빨간 물감과 파란 물감을 섞은 것처럼 검다?

그래서 오묘하다, 신묘하다, 심오하다? 

생명의 신비함이 늪같이 검고 깊은 

그 심연에서 생겨났거든     


#내_마음대로_읽는_노자_도덕경

#미친척_하고_시작해_본다

#왕필이_겨우_스물세살에_뭘_알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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