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생경한 필명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요즘 유튜브를 보면 채집과 수렵 영상을 참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거나 고동을 주우며 ‘힐링’을 한다는 채널이 많다.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나는 어쩐지 굉장한 공감과 함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내 나이 아홉 살, 그때만 해도 가덕도는 배를 타야지만 갈 수 있던 깨끗한 섬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 가는 겨울 바다 끝에서 뭍으로 가는 마지막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가덕도의 물 빠진 바닷가 갯바위 틈에서 굴을 주워 먹고 있던 나를 보던 아빠는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아니, 무슨 애가…. 바닥에서 뭘 주워 먹고 있어?”
나는 돌로 굴 껍데기를 내리쳐 손톱만 한 굴을 바닷물에 헹궈 먹고 있었다. 칼 같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가 한 손엔 돌멩이를 쥔 채 바위와 미역, 해초 사이를 뒤지며 굴을 까먹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굴 얘기를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성게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내 필명이 ‘성게를 이로부숴’인 이유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멋진 필명’을 꿈꿔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여러 가명을 떠올려 봤지만, 모두 남들이 다 선점한 이름들 뿐이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장형 이름이 번쩍 떠올랐다.
그날은 동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바닷가에서 성게를 잡아먹던 이야기가 나왔다. 여름이면 우리는 부산 시내를 벗어나 차를 타고 기장 바다로 놀러 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수영을 하다가 종종 바위틈의 성게를 잡곤 했다.
그 당시 잡을 수 있었던 성게는 ‘보라성게’와 ‘말똥성게’ 두 종류였다. 아무래도 가시가 짧은 말똥성게 쪽이 훨씬 잡기 쉽기도 했지만, 훨씬 맛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컷 놀다가 몇 마리씩 잡아 온 성게는 그 자리에서 바로 먹었다.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해변에 가더라도 우리에게는 ‘노 프로블럼’이었다.
나는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다. 왜냐하면 도구가 없으면 결국 돌을 집어 들게 되어 있으니까.
처음엔 돌로 내리쳤다. 그런데 하다 보면 용기가 생겼다. 나는 급기야 이빨로 성게를 물어 깨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빠는 초등학생인 딸이 성게를 ‘해달’처럼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놀랍고도 흡족한 표정으로 엄지를 들어 올리셨다. 그 웃음 속에는 분명 자랑스러움도 함께 있었다.
“와… 이빨로 성게를 깼어? 아우, 무섭다아.”
그렇게 나의 필명이 탄생했다.
‘성게를 이로부숴.’
여기에는 채집과 수렵의 기쁨, 어린 시절의 모험과 호기심, 그리고 세상을 스스로 깨물어 알고 싶었던 마음이 담겨있다. 세상이란 바다는 여전히 넓고, 나는 지금도 그 속에서 말똥성게처럼 탐스러운 이야기들을 건져내며 살아간다.
여기, 성게를 이로 부수는 아이가 있다.
바로 당신 눈앞에….
지나간 시간들은 왜 이토록 아련할까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오늘, 지금도 마찬가지인데요. 아마 이 글을 쓰던 시간도 언젠가는 아련해지겠지요. 힘들고 지칠 때 미래의 나에게 오늘의 이야기가 지난날의 이야기처럼 힘이 되어 줄 거라고 믿으며 1권을 마칩니다.
2권도 곧 돌아옵니다.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