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일사는 코리안맘 Mar 19. 2024

인종차별, 그 이중성과 악랄함에 대하여

한국인, 아니 아시안으로 유럽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시각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리에게 친근한 로다주와 케이팝 팬이라고 알려진 엠마스톤이 아시안 대상 인종차별을 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해당 영상을 보니 여태껏 내가 겪었던 수많은 인종차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더불어 이런 세계적인 공식행사에서 버젓이 이런 일이 일어난다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실 인종차별을 인지하는 정도는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눈빛만으로도, 누구는 대놓고 "XXXX China"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인종차별을 느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모호한 판단기준 때문에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인종차별이다 아니다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나는 이것이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게 오늘 글의 목적은 아니다.

인종차별이 얼마나 복잡한 이슈인지, 그 속에서 나는 어디까지 이중적일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의 첫 인종차별은 나의 사춘기가 절정에 달했을 14살 때 미국에서였다. 좋은 기회로 가족이 함께 미국에 살 기회를 얻게 되어 주변인의 축하와 박수를 받으며 미국행에 올랐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정작 미국에 도착한 나는 그냥 존재감 없는 나라에서 온 존재감 없는 학생일 뿐이었다. 아마 이때 난생처음으로 '아, 내가 절대 바꿀 수 없는 나의 뿌리 자체가 무시당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좋은 만남도 많았지만 처음 겪은 인종차별의 영향이 너무 컸고, 그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인종차별 레이더가 강하게 심어지게 되었다.


독일행이 결정되었을 때도, 나는 독일어보다 인종차별 대처법 공부를 더 많이 했다. 온갖 사례와 사이다급 대처법 영상을 찾아보며 소위 전투태세로 독일에 입국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불친절하게 대하면 그 사람이 다른 독일인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 유심히 지켜보며 '나에게만' 유독 불친절한 건지, '다른 사람에게도' 불친절한 건지 꼭 확인을 해야 했고, 마트에서 계산하는 직원이 나에게 인사를 안 해주면 괜히 심술이 나서 하루종일 투덜거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인종차별이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처럼 레이더를 키고다니니 결국 피곤 해지는 건 나였다. 어느 날은 유독 나에게만 쌀쌀맞은 빨간 머리 마트직원 때문에 혼자 속이 상해서 강남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으로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의 인생을 쌀 한 톨만큼도 책임져주지 않을 길거리의 랜덤 한 사람 때문에 나도 모자라 남편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을 일도 없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레이더를 끄기로 결심했다.


레이더를 끄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그런데 혼자 씩씩거리며 화내는 일은 줄어든 반면 다른 방향으로 이상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독일인이 내 심기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노잼나라 독일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니까 저렇게 좁은 시야로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쯧쯧', 이민자가 인종차별을 하면, '자기들도 이민 자면서 꼴에 여기 더 살았다고 텃세 부리는 거 봐. 추하다.' 나 또한 그들을 역으로 인종차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내 속의 이중성을 발견했다. 나에게 니하오로 인사하거나 중국 혹은 동남아에서 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그 감정의 뿌리가 내 속에 내재된 중국과 동남아에 대한 선입견 때문임을 깨달았다. AfD(독일 극우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들이 싫어하는 이민자들과 다른 부류인데 같은 취급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타이민자들과 나를 구분하길 원했다. 한국이 저출산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이민자의 문턱을 낮춘다는 기사를 보고선 특정 국가, 특정 종교의 사람들에 대해선 철저한 스크리닝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한 번도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미국에서 겪었던 서러움을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일부러라도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대학생 때는 외국학생들과 팀플도 자처해서 하고 도움도 많이 주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나 또한 별 다를 것 없는 인종차별주의자라니.



독일인들이 아시아인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면, 그들도 우리를 수준 높고 괜찮은 이민자들로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뿌듯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속에도 인종차별적 요소가 숨어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독일어 선생님은 어느 날 수업도중 나에게 본인은 폴란드와 러시아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동양인들은 좋아한다는 TMI를 날렸다. 그 이유인즉슨 동양인들은 대부분 심성이 착하고 범죄를 일으키지 않으며 성실하기 때문이라나.


지난여름, 놀이터에서 아이와 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나에게 독일어 할 줄 아냐고 대뜸 물었다. 안 그래도 독일어 연습할 사람을 찾고 있던 터라 "잘 못하는데 나한테 독일어 알려줄래?"라고 호기롭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 "아시안 여자 답지 않게 shy 하지 않네"


이것이 이들이 동아시아인, 동아시아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우리는 늘 조용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성실하게 혹은 과할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소위말해 자기네 나라에 와서 문제 안 일으키고 조용히 일하면서 세금 잘 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동양여성만 좋아하는 남성들의 'Yellow fever'가 욕먹는 이유는 그 기저에 동양여자는 순응적이고 가정을 위해 본인을 희생한다는 환상이 깔려있어서인데, 같은 이유로 아시아 이민자를 선호하는 걸 뿌듯해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이제는 누가 나를 향해 칭챙총 니하오를 외치는 것에 타격이 없다. 본인 스스로의 밑바닥을 자처해서 보여준 인간에게 연민이 들면 들었지, 그 더러움을 나의 인생에 끌고 올 수고가 아깝기 때문이다.


아시아 이민자들은 좋은 이민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뿌듯함을 느끼지도 불쾌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게 순도 100%의 칭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거기에 섞인 불순물을 비난하기엔 나 또한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도 결국엔 좋은 의도로 이야기했을 테니 적당한 미소로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어난 인종차별 문제가 나에게 유독 착잡하게 느껴진 이유는, 그 행위가 칭챙총 같은 명백하고도 일차원적인 인종차별이 아닌 '당한 사람'만 느낄만한 microagression(미묘한 차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후 양자경이 해명을 한 행위는 너무나 전형적인 동아시아 여성의 행동이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해명을 한다니. 갈등을 잠재우고자 자처해서 본인을 희생시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욱 마음이 아팠다.



여기까지가 나의 '인종차별을 대하는 태도' 성장기이다.


선택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인종을 이유로 한 집단이 모조리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인종차별은 참 악랄하다.

하지만 그 경계도 모호하고 기준도 주관적이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여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주제이다.


성숙한 인간은 인종차별을 어떻게 대처할까?

우리 아이가 인종차별을 당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직 내게 남아있는 숙제가 많지만, 사춘기 소녀가 지금 여기까지 생각을 확장시켰다면, 앞으로도 더 성숙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라 희망을 가져보며 글을 마친다.



작가의 이전글 골 때리는 독일의 행정처리 썰 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