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좋은 인격수양은 없다.
흔히들 우리나라 행정처리가 얼마나 빠르고 편리한지 유럽과 비교하며 이야기하곤 하는데,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썰을 풀고자 한다. 속 터지는 독일 행정처리로 시리즈물을 만들 수도 있을 지경.
우선 어떤 행정처리를 하면 소요되는 시간이 기본 한 달 이상이다.
일례로, 현재 나는 독일에 거주허가증을 받아 살고 있는데 약 1년마다 갱신을 해야 한다.
1인당 발급비용은 100유로 정도. 3인가족이니 300유로(한화 43만 원) 가량 든다.
작년, 거주허가증 만기를 1달 넘게 앞두고 연장신청을 하러 시청에 갔다.
*참고로 아무 때나 시청에 가면 안 된다.
사전에 시청홈페이지를 통해 담당자와 약속(테어민)을 잡아야 하는데, 한 달 정도 뒤에 약속이 잡힌다. 무턱대고 찾아갔다간 보안관리자한테 문전박대를 당할 수 있다. 우리는 2달 이후에 테어민이 잡혔었다.
당시 우리는 거주허가증 만료와 맞물려 스페인 여행을 예약했던 터라,
나중에 독일에 입국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스페인 여행 전까지 새 거주허가증을 받으면 좋겠다고 담당자에게 정중히 요청을 했다.
한 달 넘게 여유가 있었으므로 별 문제없겠지 싶은 마음으로.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너무나 독일스러웠다.
"일이 많이 밀려 장담을 못하니 임시거주허가증이라도 일단 발급받아놔"
300유로를 넘게 쓰고도 임시거주증(3인가족 발급비용은 약 10만 원가량 했던 것 같다)을 또 발급받아야 한다니! 이거 처리하는 게 그렇게 오래 걸일 일인가? 한국에서는 외국인등록증 2주 안에 나온다던데. 여권도 당일신청 가능하고 등기로 1주일 안에도 받아볼 수 있는데! 비용은 더럽게 비싸면서 서비스는 개판이네!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하지만 스페인 여행은 우리 사정.
그냥 따르는 수밖에 없지.
이용자가 아닌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 바로 독일 행정서비스이다.
또 다른 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서류를 요구하고, 행정처리에 일관성이 없다.
독일에서는 외국인들에게 '인터그라치온 쿠어스' (영어로는 intergration course)를 수강할 수 있는 바우처를 제공한다. 인터그라치온 쿠어스는 독일어와 독일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배울 수 있는 강좌이다. 그리고 그 바우처로, 원래 비용의 50%로 강좌를 수강할 수 있고 정해진 기간 안에 수업에 잘 참여하고 시험을 통과하면 지불한 비용의 50%를 또 환급받을 수 있다.
인터그라치온 쿠어스는 약 6개월 과정이고 월마다 비용이 450유로(한화 약 65만 원)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한인들은 이 바우처로 인터그라치온 쿠어스를 수강했고, 바우처만 있으면 월 15만 원 정도의 비용만 지불하면 되니 나 또한 별생각 없이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바우처가 필요하니 테어민을 잡아달라고.
그런데 약 일주일 뒤에 답변이 왔다.
"굳이 테어민 잡을 필요가 없다. 만약 학사학위 소유자라면 ㅇㅇ사이트에 들어가서 내가 한국에서 졸업한 대학이 독일에서도 인정되는 기관인지 증명서를 달라."
그런데 그 사이트에 들어가서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담당자가 말한 증명서를 발급받는 곳을 찾지 못했고, 담당자에게 당신이 말한 그 증명서의 정확한 명칭이 뭐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속 터지는 답변뿐이었다.
결국 사이트 구석구석을 뒤지며 최대한 '비스무리'한 증명서를 찾았는데, 발급비용은 200유로(약 30만 원), 발급 소요기간은 약 3개월 정도였다.
주변 한인들에게 아무리 묻고 물어도 나처럼 '한국대학 학위 인증 증명서'를 제출하고 바우처를 받은 사례가 없어서 담당자에게 다시 질문을 했다. "이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 근거가 뭐야?"
약 일주일 뒤 돌아온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독일법 ㅇㅇ에 의거, 대학 학위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우처를 제공할 수 없어"
순진하게 하라는 대로 증명서를 발급받았으면, 나 스스로 돈과 시간을 낭비해서 바우처를 받을 수 없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꼴이 될 뻔했다. 심지어 내가 첫 메일을 보내고 이런 바보 같은 답변을 얻는 데까지 든 기간은 총 3개월. 그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아까웠다.
어이가 없어서 그냥 자비로 450유로를 꼬박 내고 인터그라치온 학원에 등록을 했다. 약 2달간 다녔을 즈음, 학원 행정담당 직원에게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런 일을 처음 들어본다며 본인이 도와주겠다고 나에게 각종 서류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같은 담당자로부터 학원에 우편이 날아왔다.
나의 인터그라치온 바우처.
하지만 나는 이미 낮은 퀄리티의 인터그라치온 수업에 질려 학원을 끊고 1:1 과외로 수업을 바꾼 상황이었다.
흔히들 독일은 규칙과 매뉴얼을 중시 여긴다고 하지만 행정처리에 있어서는 '케바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흔한 일이다. 같은 상황인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경우.
돌이켜보면 한국에서는 각종 행정처리가 '나의 속도, 나의 입맛'에 맞게 처리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행정서비스에 어떤 오류나 시간의 지체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여기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나의 민원이 언젠가 제대로만 처리된다면 매우 감사한 일이다.
최근 공무원 경쟁률이 대폭 줄었다고 한다. 이전의 경쟁률이 비정상적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공무원에게 기대하는 높은 수준의 서비스에 비해 낮은 대우도 한몫을 했다는 생각이다. 비단 공공기관 서비스뿐 아니다. 의료서비스도 좋(았)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에 유일하게 싸고 좋은 게 2개 있는데, 바로 한국의 공공서비스와 의료서비스라는 말도 있을 지경. 독일에 나오고야 깨달았다. 아 이게 당연한 게 아니구나, 지속가능하지 않을 수 있구나. 국민이 이를 감사히 여기고 지켜주지 않으면 언젠간 사라질 수 있는 엄청난 가성비의 서비스구나.
친하게 지내는 같은 한인이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탈리아에 사는 한 친구가, 독일의 답답한 행정처리 썰을 듣곤 놀라며 던진 한마디,
"와 거기는 어쨌든 일처리가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