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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노예의 피

<재즈문화사>를 함께 읽어보아요 (1) - 재즈의 첫걸음에 관심을!

by 김소이

글을 열기에 앞서, 공동 매거진 공간을 열어주신 서민혜 작가님, 재즈문화사에 관한 글을 쓰도록 허용해 주신 희원이 작가님 두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 매거진에 글을 게재하는 것에 응원의 말씀을 나눠주신 작가명미정 작가님, 무연고 작가님, 초맹 작가님, 나현수 작가님, 바람 작가님, 희야 작가님, 강경 작가님, 고운로 그 아이 작가님, 남연 작가님, 채수아 작가님, 호랑 작가님, 이원길 작가님, 오렌 작가님, 검은머리앤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공동매거진의 독자이신 힐비게이터 HILton nav
IGATOR 작가님, 고운로 그 아이 작가님, hannah 작가님, ㅁㄴㅇㄹ 작가님, 위엔디 작가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감사의 인사와 함께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을 글로 써본 적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글을 쓰는 것이 약간 두렵기도 하고, <재즈문화사>를 펴내신 희원이 작가님께 선을 넘는 글을 쓸까 봐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요. 평소 재즈를 배경음악으로만 즐기던 제가, 이 책을 통해 그 음악에 담긴 역사를 읽고 더 깊이 있는 재즈 감상을 할 수 있게 됨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재즈문화사는 음악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재즈를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책이었습니다. 재즈라는 음악 장르에 대해 하나의 책으로 정성스럽게 엮어낼 만큼 열정을 가진 희원이 작가님은 분명 사랑이 많은 분일 것이라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원희 작가님의 글이 더 알려지고 유명해지셨으면 하는 마음 두 스푼을 제일 아래에, 제가 좋아하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을 살짝 소개하고 싶은 마음 반 스푼을 중간에, 마지막으로 서민혜 작가님과 깊은 교류를 하고 싶은 마음 두 스푼을 제일 위에 진하게 타 넣은 글을 쓰게 됩니다.

Chapter 1. 노예의 피에서는 재즈 음악이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장에서는 재즈가 어떻게 개인의 내면세계를 반영하며, 동시에 사회적 압력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는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재즈는 시대의 흐름과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면서, 음악을 통한 저항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재즈가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장을 다 읽고 나서 인상에 남아 다시 돌아와 읽은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문학적으로 상상해 보자면,

“그들은 사냥당하듯 잡혀 배에 실렸다. 사슬에 묶인 채 돼지가 사육되듯 음식물을 받아먹으며 지독한 뱃멀미를 견뎌야 했다. 그들은 백인의 채찍을 맞으며 아픔을 참아냈다. 저마다 출신부족이 달랐기에 소통조차 원활하지 못했지만, 검다는 이유 하나로 짐승 취급됐다. 죽은 자들이 바다에 던져지는 극한상황에서 소리 죽여 공포에 떨어야 했고, 들리지 않게 고향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프리카의 빛나는 태양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쿠바로 이송되었고, 노예시장에서 상인들의 흥정이 끝나면 전시되었다. 상품은 곧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렸다. 상인들은 이문을 남겼고, 노예들은 의문을 가졌다. 왜 자신들이 배에 태워진 채 고향을 떠나야 했는지, 그리고 다시 배에 실려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다. 뉴올리언스로 향하던 노예들도 각자의 고향을 기억하며 노래를 불렀다. 반드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이원희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흑인 노예들의 마음을 더욱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위 두 단락을 통해, 살아 있는 영혼을 사슬에 묶어 억압하는 잔혹한 장면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습니다. 고향의 태양과 뉴올리언스의 태양은 분명 달랐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태양은 밝으나 살을 태울 듯 뜨겁지 않을 것이고, 뉴올리언스의 태양은 어둡지만 영혼을 태울 듯 뜨거웠을 것입니다. 노예시장의 소음 속, 상인들의 어두운 욕심 너머에서도, 뿌리 깊은 기억을 노래한 그들! 향수와 기억이 고통의 쇠사슬을 끊을 수는 없지만, 그 순결한 마음만은 결박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단순히 재즈가 흑인의 노래겠거니라고 알고 있던 저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제, 정신분석 수다 좀 떨어볼게요.


저는 주업에서 글보다는 '말'로 작업하는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절 찾아온 분들의 많은 부분을 살펴봅니다. 그들의 소리가 노래로 들리는 건 아니지만, 그 안의 내용은 물론 '말'의 톤, 음정, 높낮이, 그 사이 호흡, 빠르기, 말하는 동안의 동작들, 심지어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가 어느 방향으로 떨어지는지, 앞니 사이가 어느 정도 벌어지는지, 울 때는 입술의 어느 쪽이 더욱 찡그려지는지도 봐요. 그러다 보니 전 평소에는 음악을 멀리 합니다, 음악을 듣는 건 저에게 굉장히 피로한 일일 때가 있기 때문이에요. 아마 프로이트도 그랬을까요?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어요.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에서 예술가들과 예술 작품에 대해 다양한 논평을 남겼지만, 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완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아, 프로이트가 음악을 완전히 무시했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이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20세기 최고의 천재로 여기지는 프로이트가 음악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요. 아마도 어쩌면, 프로이트도 인간이기에 음악에 있어서만은 그렇게 깊이 있는 이해를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요.


프로이트의 저서를 보면 프로이트는 예술가의 심리에 대해 계속 양가적인 모습을 보여줘요. 그는 건강한 사람들은 공상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예술가 자체를 신경증 환자로 만들기도 했었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분석으로는 예술가들 즉, 천재를 설명할 수 없다고도 주장했어요.


저는 앞으로는 매거진 글에서 '프로이트라면 재즈를 이렇게 바라봤을 것이다'라는 글을 적으려고 하는 건 아니랍니다. 그게 가능하지도 않고요. 아참! 그리고 저는 공식적으로 인증받은 정신분석가는 아니에요. 아직은 그저 정신분석학 공부를 좋아하는 평범한 정신과 의사랍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의 정신분석적 해석이 선배 정신분석가 선생님들의 시선에서는 아주 터무니없고, '저런 소릴 감히 하다니!' 이러실 수도 있을 텐데, 그분들은 이곳에 오지 않으실 듯하니(움하하하!, ^o^) 편하게 마음 놓고 제 생각을 활짝 펼쳐 보겠습니다.


1880년대 만들어진 정신분석학의 저술들부터 쭈욱 살펴보면, 당시의 정신분석가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좀 더 집중한 느낌이에요. 초기의 정신분석 저술들에서 청각적인 면은 잘 보이지 않죠, 정신구조를 설명할 때도 딱딱하게 빙하 그림으로 설명해 줍니다. 그 때문에 전 정신의학을 전공하는 것을 망설이기도 했어요. '아니,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저렇게 단순히 설명을 한다고? 너무 별로인데? '무의식'이라는 단어는 대체 뭐야? '비의식'과 같은 동의어인가?' 이러면서요. 그런 식으로 시각적인 이미지로 설명했던 건 프로이트가 여러 감각능력 중 시각적 능력이 더 뛰어났다고도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딴 얘기지만, 프로이트는 괴테문학상을 받았답니다)


정신분석가들이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테오도르 라이크라는 정신분석가가 ‘제3의 귀로 듣기’라는 책을 1948년 출간하고 나서인데요. 그 이후로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음악과 관련된 많은 주제에 대한 연구 발전에 기여해 왔어요. 좋은 음악적 청취와 좋은 분석적 청취의 유사점, 심적 고통의 형태와 음악적 표현 사이의 관계부터 시작하여, 요새의 대세인 ‘예술 치료’에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최고의 언어로서의 음악의 역할에 대한 연구가 뇌과학적으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죠. 안타까운 점은 청각에 대해서는 아직 많이 밝혀진 바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아직은 쥐들한테 소리를 들려주는 정도의 방식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쥐들이 베토벤 음악을 이해하기도 어렵잖아요? 아쉽습니다.


고대에 음악은 성악으로만 이루어졌고, 시는 주로 노래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단어는 어휘적 의미보다는 소리, 리듬, 억양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구성 요소는 의식적 표현으로 번역할 수 없는 초기 경험을 감각적 흔적으로 나타냅니다. 언어학자 스티븐 펠드에 따르면 목소리는 신체에 있어 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어요. 그는 ‘목소리는 신체의 많은 부분을 연결하며, 머리와 가슴에서 울려 퍼짐으로써 땅의 연결이 물의 '흐름'에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전신이 목소리의 '흐름'에 항상 존재한다’라고 했답니다.(Feld, 1994, 12p)

Chapter 1. 노예의 피를 읽고서, 재즈를 부르던 흑인 노예들의 소리, 리듬, 억양 속 차마 의식이 담기 어려웠던 그 상처의 경험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서 흐르던 목소리를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이번 글에서는 독자분들의 재즈 감상에 저의 누추한 정신분석적 해석이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라며 음악에 대한 정신분석적 시각에 대해 간단히 엿보는 소개로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노예의 피로 시작했다는 재즈의 역사를 마음 한편에 두고, 평소 좋아하시던 재즈 음악을 들은 후 간단한 감상평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함께 얘기 나눠보아요! 여러분들의 생각이 아주 궁금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은 이원희 작가님의 재즈문화사 1장 '노예의 피' 마지막 단락과 저의 1장 감상을 표현한 그림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물론 재즈가 미국흑인들의 자부심이면서 노예무역과 선조들의 아픈 흔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켜온 위대한 예술은 상처의 대가였다. 재즈의 자부심은 오랫동안 흑인의 아픔을 먹고 자랐다. 그 모순은 '노예의 피'를 타고났다는 멍에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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