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문화사>를 함께 읽어보아요 (4) - 청취와 친밀감
대개 우리는 ‘어떤 문장을 읽었기 때문에’ 감응할 수 있다. 단순히 양이 많지는 않더라도 분명히 문장이 존재한다. 그것이 충분히 좋은 내용이라면, 적은 단어, 짧은 문장, 몇 줄의 문장으로 구성된 문단만으로도 독자는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얼마나 적재적소에 적확한 언어를 사용하여 경제적으로 말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마일스의 음악에서도 그렇다. 그런 면에서 ‘절제’와 ‘발산’의 긴장을 달리 표현하면, ‘은근히 드러냄’과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냄’ 사이의 긴장이라 할 수 있다. 그 긴장관계에서 절제미가 생긴다. 결국 ‘드러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드러냄’의 행간에서 적절히 ‘침묵’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침묵’은 ‘음 채우기’와 ‘음 비우기’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완벽히 침묵한다면, 일반적인 의미의 음악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음악의 침묵은 ‘음 최대로 채우기’와 ‘음 최소로 채우기’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음 비우기’는 ‘음 아끼기’다. 단지 음을 아껴, 느슨해진 음의 행간에서 허용된 ‘침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아름다운 침묵이 발생한다. 그것은 음이 사라지는 걸 기약하고, 음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발생할 것을 기약한다.
하지만 ‘음 아끼기’는 결코 쉽지 않다. 냉정한 자기비판과 통찰이 없을 경우, 어느 한 음도 아끼지 못하거나 중요한 걸 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면 쓸데없는 말까지 늘어놓거나, 말을 지나치게 아끼는 바람에 정작 할 말을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아끼기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고, 자신의 발언을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자연히 말은 느려지고, 말과 말의 행간이 벌어진다. 이는 치열한 논쟁을 하는 동안에는 잘 생기지 않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