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넘기기 힘든 이유
종종 타지에서 외국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좀 빡세다고 느껴지곤 합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자마자 눈을 쭉 찢거나 고약한 냄새라도 난다는 것처럼 코를 막고 지나가는건 그나마 양반이고, 영국에서 석사 공부를 할 때는 중학생들이 낄낄거리며 자전거로 치고 도망쳐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에 굴러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히고 경찰을 부른적도 있습니다. 그 경찰들마저도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는 않았지만요. 내가 영국인 남성이어도 그렇게 대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네팔에서는 비슷한 유형의 차별을 당한 적은 없지만 '하이 섹시걸' 휘파람을 부르며 다짜고짜 자기 오토바이에 태우려는 또라이들을 볼 때 마다 다음에 만나면 꼭 대가리를 깨버려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늘 다짐에 그칩니다. 아마 동양인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주-옥같은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됬었겠지요.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쌓아올린 고학력 전문직 타이틀이 아마 어느정도는 저를 지켜줄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껏 일그러진 세상의 구조 속에서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 영유했기에 눈치채지 못했던, 겹겹이 둘러쌓인 수많은 특권들 덕분이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사람을 향한 차별과 배제는 참 상대적이면서도 간사하고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홉살이었는지 열살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을 주무르다 아직 덜 여물었다고 덧붙이던 동네 아저씨의 목소리와 늘어진 티셔츠도, 그 날의 골목길 풍경과 내리쬐던 햇살조차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말이에요. 중학생 때는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헤드폰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뺨을 여러대 맞아야 했던 것도, 교실에 있는 그 누구도 그걸 막아서지 않았던 것도 기억합니다. 고등학생이 되고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학교에 남아 야자를 하다 돌아가려 짐을 싸던 중 경비 아저씨가 대견하다며 칭찬을 하던 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곳에 시집가려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말만 안 덧붙였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막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번호를 알려주기를 거절하자 같은 역, 같은 출구에서 내려 아파트 경비실 근처까지 따라오던 그 사람의 얼굴또한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울어지고 치우친 것이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나이를 몇 살인가 더 먹고, 너는 기가 너무 세니까 조금만 사근사근하고 예쁘게 말하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때 즈음인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결혼을 해야한다고 당연하게 이야기하던 막 12살이 된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네팔 산골짜기에 위치한 허름한 교실에 앉아 단정하게 연필을 쥔 아이의 고요한 얼굴 속에서 앞으로 이 아이의 인생에 당연하게 자리할 수많은 차별을 보고 맙니다. 제가 경험한 부당함을 이 아이는 겪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에게는 그저 아프기만 했던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오롯이 남은 분명함은 가난도, 카스트도, 성별도 이 아이의 꿈을 막을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건 우리 어른들에게 남겨진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바라건대 아이들의 편에 설 수 있기를. 알량한 지식과 재능이나마 아이들을 위해 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