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정도 되었을까요. 마을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린적이 있습니다. 아마 아이들과 뛰어노는데 정신이 팔려 어딘가에 떨어뜨려버린 모양입니다. 사진이나 음악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하는 백업용 핸드폰이었던터라 잃어버려도 당장 크게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주변에 있는 몇몇 아이들에게 떨어진 핸드폰을 본적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열두살이었던 디페시가 같이 찾아주겠다며 자기만 믿으라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급기야 제 손을 꼭 쥐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같이 핸드폰 찾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피로감이 몰려와 잠시 돌바닥에 털썩 앉으려는 순간 단호하게 막아섭니다.
"승지야 여기 앉지마!!"
"엥? 왜??"
"너무 더러우니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그러더니 어디선가 종이 박스를 찾아와서는 반듯한 면을 골라내 찢어 정성껏 바닥에 깔기 시작합니다. 자그마한 손으로 박스에 묻은 흙을 야무지게 탁탁 털어내기까지 합니다. 그제서야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 앉으라 손짓합니다. 우리 땅꼬마 탐정이 너무 의젓한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듯 배시시 웃는 아이의 말간 얼굴을 보고있자니 이대로 핸드폰을 못 찾아도 별로 속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덕분에 다정한 꼬마 탐정에게 하루종일 에스코트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결국 그날 핸드폰을 찾지 못했지만 디페시는 제가 이튿날 마을에 돌아올 때까지 집집마다 열심히 물어보고 다녔다고 합니다. 다행히 핸드폰은 지나가던 주민분들이 주워서 보관중이었습니다. 제 품에 무사히 돌아온 낡고 금이 간 핸드폰을 볼때마다 그날의 따스한 기억을 조용히 떠올리곤 합니다.
아이들과는 마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유난히 볕이 잘드는 따스한 날에는 소풍을 나가기도 합니다. 그 날이 딱 그런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마침 겨울 방학이라 시간이 많고, 햇살은 잔잔하니 자박자박 걷기 좋은 그런 날이요. 오늘은 뭐하고 놀까 고민하다가 마을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전망대에 나들이를 가기로 했습니다. 소풍을 가는 날에 아이들은 으레 부모님들을 보채 용돈으로 50루피(한화 약 500원)씩을 받아옵니다. 전망대 매장에서 파는 음료수나 라면땅, 그리고 커피 사탕을 사먹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이렇게 나들이를 가는 날이면 아이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제일 예쁜 옷으로 갈아 입고 잔뜩 신이 나서 뽐내듯이 걸어나옵니다.
그 중에는 굳이 한 겨울에 반짝이는 큐빅이 박힌 여름 샌달을 신고 나오는 아이도 있습니다. 치장을 끝내자 2리터짜리 큰 패트병에 물도 가득 채워 씩씩하게 집어듭니다. 전망대까지 이어진 산길은 산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다 떨어져가는 슬리퍼를 신고도 식은 죽 먹기이지만 허약한 어른에게는 너무나 힘든 여정입니다. 학교와 집만 왕복하며 다져진 개복치 체력이 끝끝내 발목을 잡습니다. 어느새 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제가 헉헉대며 뺀질거리는 걸 그세 눈치챘는지 아이들은 제 카메라 가방과 외투를 대신 메더니 씩씩하게 앞장을 섭니다. 나이만 들어서 참 면목이 없습니다. 잠시 쉬어가려 멈춰선 공터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벽돌을 주워오더니 자그마한 의자를 만들어줬습니다. 벽돌 의자에 앉아 급하게 숨을 고르며 물을 들이키고 있노라면 아이들은 길 사이사이에 핀 들꽃을 꺾어 만든 샛노란 꽃다발과 붉은빛의 산딸기를 내밀기도 합니다. 한 겨울이라 핀 꽃도 몇 없을텐데 어디서 이런 고운 꽃을 찾아오는건지. 선선히 부는 바람 사이 사이로 해사한 미소가 섞여듭니다. 전망대가 곧 보일만큼 가까운데, 이대로 조금만 더 이 시간을 붙잡아둘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전망대라고 부르기에도 조금 민망한 세로 10미터짜리 철골 구조물이 있는 산 정상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입장료로 10루피씩을 내고 우르르 계단을 오릅니다. 마을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 코스인지 몇몇 커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어른들이 쳐다보건말건 마냥 해맑은 아이들은 제 카메라를 들고 서로 사진을 찍으며 놀기 바쁩니다. 겨울 산바람이 매서워 눈앞이 안보일 정도로 머리카락이 휘날립니다. 그 꼴을 보고 재밌는지 아이들은 또 깔깔 웃기 시작합니다. 전망대까지 구경을 마쳤으니 이제 마을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싶었는데 아이들이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합니다. 반짝이는 눈망울에 대고 거절을 말할 수 없었던 저는 어쩔 수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들을 따라나섰습니다.
전망대를 넘어 서쪽 방향으로 약 20여분 정도 걸어내려가니 놀랍게도 그 곳에는 다 쓰러져가는 관람차와 몇몇 놀이기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찾은 건지. 산 속에서 보수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된 놀이 공원을 발견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얼굴 한가득 물음표를 띄운 제 손을 아이들은 신나게 잡아끌었습니다. 다소 조잡하게 겉면 잉크가 싹 다 벗겨진 범퍼카에 앉아 운전대를 두드리고, 움직이지 않는 관람차 안에 들어가 바깥 경관을 보는 시늉을 해봅니다. 그 흔한 바이킹이나 롤러코스터도, 회전목마도 모노레일도 없는 조잡한 공간이었지만 우리는 분명 함께 놀이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어느새 날이 늦어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며 다 같이 놀이공원에 작별인사를 합니다. 아이들은 못내 아쉬운 듯 자꾸 놀이기구 쪽을 흘끔흘끔 쳐다봅니다. 매점이라도 있으면 솜사탕이랑 츄러스도 사줬을텐데, 커다란 풍선도 손에 쥐어주고 싶은데, 허겁지겁 다 먹고 스틱에 녹아 엉겨붙은 솜사탕 설탕 덩어리처럼 미련만이 덕지덕지 남아버립니다.
불연듯 제 어린날 몇번 방문했던 놀이공원을 떠올립니다. 어느정도 철이 들고 나서는 딱히 놀이공원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아직도 확실히 기억하는 몇몇 순간이 있습니다. 햇빛을 받아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던 대형 비눗방울, 삐에로 분장을 한 광대 아저씨와 사진을 찍었던 일, 친구가 경주 게임에서 1등을 해 커다란 곰인형을 타왔던 일. 아마 그 이색적이고 현실과 약간은 동 떨어진 공기가 좋았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오늘이 아이들에게 딱 그런 날로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몇년이 지나 불연듯 떠올렸을 때 잔잔하게 미소가 스며드는 그런 좋은 날로.
몇년 전 네팔 다딩(Dhading)지역에 있는 학교에 봉사 활동을 하러 간적이 있습니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려 3시간, 다딩베시에 도착해서도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3시간 더 달려 산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카툰제(Katunje)에 도착했습니다. 외부인을 위한 숙박 시설이나 레스토랑은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이었기에 남편을 간병하며 학교 근처에서 작은 식당을 하시는 할머님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지진 당시 무너진 건물 뒷편에 철골과 양철판으로 엮어 만든 작은 임시 주택이 저희가 일주일 동안 머물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우선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저희를 반긴 것은 손바닥만한 거미 다섯마리였습니다. 이에 더해 밤이 되자 거미보다 무서운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밖이 훤히 보일 정도로 구멍이 난 양철판 사이로 쉴새없이 뼈가 시리도록 찬 바람이 새어들어왔습니다.
네팔은 산 위에 있는 나라라 고도가 높기 때문에 한겨울 밤에는 엄청나게 춥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오들오들 떠느라 첫날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힘든 기억만 있었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닙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잔잔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느긋하게 피어오르는 장작불과 짹짹거리는 새소리, 스며들어오는 햇살 사이로 쌀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잔잔하게 비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삼삼하게 간을 한 시금치 나물에 볶은 감자가 전부인 달밧. 장작불이 꺼질새라 긴 파이프로 후후 숨을 불어 넣어 함께 모닥불을 쬐던 것, 커다란 가마솥에 라면을 끓여 마을 사람들과 호호 불어 나누어 먹던 순간들도 떠오릅니다.
카툰제는 따망(Tamang)족이 살던 마을이었는데, 할머니는 멘도마야(꽃사랑)라는 제목의 따망 민요를 가르쳐주시며 노래를 부르거나, 박수를 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시기도 했습니다. 이 때 겁없이 네팔 전통 증류주인 락시(Raksi)를 받아마시고 반쯤 기절한 건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입니다. 2년 정도 전에 투병중이었던 할머니의 남편분이 결국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지금껏 지켜온 꽃사랑은 어떤 형태였을까요. 문득 문득 궁금해지는 그런 날입니다.
'나마스테(Namaste)'라는 인사말에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신성에 경배합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각자의 불성, 신성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현하는 인사말은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네팔 사람들의 고아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신성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신성 또한 귀하게 여기는 것. 이렇게 온화하면서도 아름다운 인사말이 달리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듭니다. 지금껏 참 많은 나라를 여행해왔지만 네팔에는 그 여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잔잔한 온화함이 깃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껏 네팔을 10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도 그 유명한 히말라야 트레킹도,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는 포카라 근처에도 못가봤습니다.
때문에 제가 생각한 네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위엄있게 솟은 설산이나 투명한 호수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자리한 기억의 조각들은 동이 틀 무렵 울려퍼지는 나직한 종소리, 은은하게 구불거리며 퍼지는 향 내음, 선명하게 흔들리는 오색 빛깔의 다르촉(Tharchog), 길가 곳곳에 놓여있는 메리골드의 노란 빛깔같은 잔잔함입니다. 매번 개고생을 다양하게 잔뜩 하고나서 당분간 네팔 절대 안갈거라고 다짐을 하고도 한국에 돌아가 얼마 지나지 않은 사이에 그 따스했던 풍경들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아마 그 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것은 네팔 사람들의 잔잔한 미소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몇번이고 보아도 그저 좋은, 그런 웃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