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일단 한 번 들어오면 4주 동안은 나갈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 유엔 컴파운드에 들어온 직원은 특별 휴가 사이클이 돌아오기 전까지 출장 및 공무를 제외하고는 컴파운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유일하게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은 다른 유엔 기구의 컴파운드 뿐이다. 그나마 아프가니스탄은 휴가 주기가 4주로 매우 짧은 편이기 때문에 다른 사무소와 비교하면 가장 빨리 나가는 축에 속한다. 컴파운드에는 직원 카드로 한 끼에 5달러를 내면 먹을 수 있는 뷔페식 레스토랑이 하나, 심각하게 맛이 없는 커피를 팔지만 독과점이기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사마실 수 밖에 없는 카페가 하나, 그 외에 큰 정원과 작은 정원이 각각 하나씩 위치하고 있다. 유일한 매점에서는 다 시들어가는 토마토, 오이, 싹이 난 감자, 그리고 비쩍 말라 쪼그라져가는 당근 등을 시장 가격보다 2배 정도 비싸게 웃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다. 컴파운드의 특이한 점은 다른 시설에 비해 운동 기구 하나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인데, 결코 넓다고 할 수 없는 단지 안에 체육관이 웨이트, 유산소, 복싱장으로 나뉘어 무려 세 곳이나 운영되고 있다. 이는 이 시설이 유엔 컴파운드가 되기 전, 그러니까 미군 및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탈레반이 한창 치고받던 시절에 민간 용병 업체가 사용하던 숙소였기 때문이다.
카불에 도착해 며칠 간 컴파운드 내를 돌아다니다보니 본인만의 루틴과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독 많다는 걸 깨달았다. 대표적으로 매일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운동을 3시간씩 하고 출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평일 저녁 여덟 시쯤 되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며 컴파운드 내를 돌며 산책하는 그룹이 있고,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피규어 조립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 등이 있었다. 컴파운드 고양이 보호 협회의 회장직을 맡은 사람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배식 포인트를 돌면서 사료를 채워넣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 외에 암묵적으로 저격 위협 때문에 출입이 금지된 루프탑에 세큐리티 몰래 올라가 매일 슬며시 일몰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인간이 하나, 퇴근하면 방에서 날마다 물담배를 태우는 인간이 하나, 그리고 업무 스트레스가 쌓이면 엄청난 양의 브라우니와 초코 쿠키를 구워 습관적으로 주변 사람을 살찌우는 걸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 등이 있었다. 쏟아지는 업무에 더해 직장 사람들과 같은 곳에 갇혀살다보니 컴파운드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스레 점차 상한 동태눈을 하게 되기 때문에 다음 휴가 주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얼굴만 마주쳐도 금방 알 수 있다.
답답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컴파운드 생활의 좋은 점은 생각보다 많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같은 험지 지망이었던 나로서는 평소에 좀 별난 애 혹은 더 나아가 또라이 취급을 받는 느낌이 있었는데 여긴 이미 아프가니스탄에 자원해서 제 발로 걸어들어 온 시점에서 다들 고만고만하게 정신이 나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를 그렇게까지 이상한 눈으로 보진 않는다. 아마 이 컴파운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정신 나간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그나마 제일 정상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고만고만한 별종이라고 해서 고만고만한 이유로 파견을 온 건 아니다. 자식들 학비를 벌기 위해, 바짝 벌어서 집 사려고, 이번 임기만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연인이랑 결혼하려고,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으니까, 커리어적으로 좋은 선택이니까, 일이 보람되니까 등등 각기 다른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아프간 행을 결정했을 것이다.
운동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 외에 컴파운드 생활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생활이 매우 편하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살면서 어떻게 생활이 편할 수 있냐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사실 컴파운드에서는 청소, 요리, 빨래 등 살림의 대부분을 회사가 고용한 업체 사람들이 대신 해주기 때문에 업무 외엔 따로 신경 쓸 일이 거의 없다. 퇴근 후에는 남이 차려준 밥 먹고 운동한 뒤 씻고 스트레칭하고 영양제 챙겨먹고 자기만하면 된다. 비록 그 밥이 다소 맛이 없고, 식당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지만 종종 그 음식을 먹고 집단 식중독에 걸리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걸 제외하면 정말 지내기 편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숙소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서 1분도 채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점심만 빨리 먹는다면 내 방 침대에서 쾌적하게 낮잠까지 때릴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분리수거 날짜를 따져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필요도 없고 아 오늘 저녁 뭐 먹지 고민하면서 장을 볼 필요도 없고 흰 옷, 색깔있는 옷, 검은 옷을 나눠서 빨래를 돌릴 필요도 없다. 다만 사회의 정상 인간으로서 살림력을 상실하게 된다. 언젠가 썩은 동태 눈깔로 나를 내려다보던 동생놈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너는 일이랑 공부밖에 할 줄 아는게 없구나.”
뭐라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틀린 구석이 정말 하나도 없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생놈에게 말싸움으로 졌다.아마도 사람을 어른으로 만드는 건 돈을 많이 버는거나 커리어적인 성공만이 다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나이에 비해 커리어를 꽤 야무지고 알차게 쌓았다고 자신할 수 있고, 돈도 제법 잘 벌지만 커리어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의 발전은 영 시덥잖다. 쓰레기를 쌓아두지 않고 제때제때 분리해서 버리는 것, 퇴근하면 옷을 벗어서 바닥에 던져두지 않고 바로 걸어서 널어두는 것, 잠을 못자고 피곤에 찌들어 탄 비행기 옆자리에서 아이가 목이 터져라 울어도 웃으며 넘어가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게 아닐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맑은 눈의 광인이 너무 많았다
영화나 다큐멘터리 속에 나오는 긴급 구호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극한 상황과 정신적 압박 속에서 자신을 몰아세우며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사람? 밤샘을 밥먹듯이 하면서 자신을 갈아넣는 사람? 종국에는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 사람? 그런건 가짜 광기다. 또 미안하지만 그렇게 갈아넣어봤자 인간의 열정과 체력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삼개월도 못버티고 나가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광인이란 무엇인가?
여기 아주 좋은 예시가 있다.
올해로 아프가니스탄 4년차를 맞이한 기획팀 팀장 T씨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비건으로서 채식 식단을 하고, 매일 출근하기 전 새벽 5시부터 3시간의 운동 루틴을 끝낸 뒤에야 회사에 나오며, 담배도 피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컴파운드 식당에 비건식이 제대로 나올리가 없기 때문에 그는 쌀과 렌틸콩을 비롯한 탄수화물군과 생야채, 후무스만 먹으며 매일 매일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간식류도 모조리 우유와 달걀이 들어가기 때문에 단당류 섭취도 쉽지 않다. 그런데 언제나 하하하 웃으며 유쾌한 얼굴로 다닌다. 적어도 나는 아프가니스탄에 와서 1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찡그리는 얼굴을 본적이 없다. 그 잔잔하게 돌아있는 눈빛에서 진정한 심연을 본 것 같다. 이게 진짜 광기다.
어떤 자부심은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
개발협력업계에서 긴급구호 현장만 쫓아다니는 도파민 중독자들을 공공연하게 이멀전시 정키라고 부르곤 하는데 대충 반은 맞고 반은 다소 오해가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가자를 비롯해 현재 분쟁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아프가니스탄이나 남수단같이 연식이 오래된 구호 현장은 나름대로의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다. 즉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잔해를 뒤져 사람을 구해내고 텐트로 만든 임시 사무소에서 일하는 경우는 재해나 분쟁이 발생하고 초반 3개월에서 길게봐야 반년까지이며 그 뒤로는 현지에 있는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를 개조해 어떻게든 사람이 중장기적으로 머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된다는 소리다. 직원들이 안전하게 생활하고 일할 수 있도록 초반 환경을 세팅하는 역할을 하는 팀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나는 2021년 8월에 탈레반이 정권을 잡고 난 이후 1년 반이나 지나서 아프가니스탄에 왔기 때문에 상황은 상당히 진정이 된 편이었고 사무실마다 달린 방탄 철문만 없었으면 그냥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회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특히 내 업무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보낸다. 필드에 나가기 위해서는 따로 탈레반의 경호를 요청해서 에스코트를 배정 받아야하기에 앵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굳이 나가지 않고 필드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협력해서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나도 일하면서 도파민을 느낀다. 근데 내 도파민은 간간히 들리는 총소리나 지진 경보 사이렌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걸 조금씩 실감하게 될 때에 아주 잔잔한 형태로 천천히 찾아온다. 작년 초까지만해도 WFP 아프가니스탄 사무소는 긴급 식량 지원 프로그램 하나만으로 한 달에 1300만명을 지원했다. 다른 프로그램까지 포함하면 지원을 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거진 1500만 명에 육박한다. 네팔 사무소에서 일할 때와 아프가니스탄 사무소에서 일할 때를 비교해보면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석한다는 점에서 내가 하는 일의 속성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이 일의 결과물이 돌고돌아 더 많은 사람의 식탁을 채울 수 있다는 것에 잔잔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어떤 자부심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기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내는 이십대의 마지막 나날들에 단 한 점의 아쉬움이나 후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