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승지 May 19. 2024

워크숍 중에 탈레반이 난입해 숨은 썰 푼다

그래, 잘 모르겠지만 일단 튀고 보자

이 나라는 정말 기괴하다. 여러 나라에 살았지만 여태껏 이런 나라는 없었다. 때는 작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식량위기 수준을 평가하는 IPC 분석 워크숍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사이즈가 맞지 않게 큼직하여 발끝까지 흘러 다니는 아바야를 입고 몇 번씩이나 넘어질 뻔했고 규정에 따라 스카프를 히잡 삼아 둘렀으나 자꾸 모양이 흐트러져 여러 번 모양을 고쳐 매야만 했다. 워크숍 회장에서 하루에 2번 준비해 주는 커피는 살벌하게 맛이 없었다. 언제 먹어도 쓰고 탄내 밖에 나지 않는 놀라운 맛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헤라트 지방에서 올라온 현지 남자 직원이 내가 눈치챌 정도로 은근히 깔보면서 내 실력을 의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내가 담당하는 지역과는 관련성이 매우 적은 데이터를 들이밀며 내가 데이터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며 수차례 말을 얹었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둔감한 편이기 때문에 내가 눈치챌 정도라면 그 사람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에 상당한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무소 직원들은 언제나 나를 한 명의 전문가로서 존중해 주었기에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묘한 의심의 눈초리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 머릿속에서 IPC 워크숍은 약간 아프간 시니어 보이스카우트 같은 느낌인데, 따땃한 온실 같은 사무소를 벗어나자마자 생각보다 다양한 인간 군상과 빌런들을 만날 수 있다. 발표 후에 피드백하고 있는 사람 말 끊어먹고 자기 할 만만 하다가 다른 사람 말할 때 말 끊지 말라는 말조차도 바로 끊어버리고 꿋꿋하게 지 할 만만 하는 인간이 하나. 너는 이 지역 안 가봤지? 나는 10번 넘게 가봤는데 ㅋ 나는 지역 전문가야 유세란 유세는 다 부리다가 시간 안에 본인 분석 반도 못 끝내고 종국에는 내 분석을 그대로 복붙 해서 본인이 한 것처럼 위장하려다 걸린 인간이 하나. 보라는 데이터는 안 보고 본인 머릿속 상상에 근거해서 소설을 쓰거나 데이터를 지 맘대로 바꿔 적는 인간이 하나. 마켓 데이터 분석은 제대로 끝내지도 않고 토마토 가격 하나에 매몰되어 5분 넘게 토마토 이야기만 하는 인간이 하나.



그래도 악의를 가지고 일부러 못된 말을 골라 내뱉는 사람은 없으니 이 정도면 귀여운 편이라고 생각하며 곧 정신을 차리고 내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창 노트북을 바쁘게 두들기고 있는데 주변이 한순간에 부산스러운 소음으로 가득 찼다. 곧이어 현지 여성 직원들이 재빠르게 구석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고 워크숍 담당 직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 구석을 가리키며 빨리 튀라고 손짓했다.


나는 입모양만 벙긋거리며

“왜? 왜? 뭔데?”

라고 물었고 그는 다시

“진짜 미안한데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빨리 튀어주면 안 될까?”

라는 긴 문장을 체감상 2초 안에 랩 하듯이 말했다. 평소엔 엄청 느긋하게 말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빨리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점심 식사를 세팅하러 온 아프간 남성 직원들과 마주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날 워크숍 회장을 다녀간 건 탈레반이었다.


이 나라에서 여성은 일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남성과 여성이 한 자리에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석가로서 워크숍에 참가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고

그렇게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피해서 숨었다.

아마 초등학생 때 했던 경찰과 도둑 이후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도망이었을 것이다.


워크숍 회장 구석으로 잽싸게 튄 우리는 밖에서 보이지 않는 칸막이 안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탈레반이 회장을 떠날 때까지 여성 직원들 사이에서는 어색한 공기만이 흘렀다. 참으로 거지 같은 순간이었다. 실제로 유엔 직원을 질질 끌어다 감방에 잡아넣기야 하겠느냐만은 이건 경고나 다름없다. 너희들 우리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알아서 기어라. 탈레반의 불시검문은 워크숍이 끝나는 날까지 수차례 더 이어졌고 그때마다 우리는 눈치껏 구석 혹은 옆에 마련된 방으로 달려가 숨어야 했다.


있는 힘껏 우리의 존재를 지워봐. 지워지나.

탈레반의 불시 검문에 대비해 워크숍 회장 입구에는 망을 봐주는 직원이 있다. 물론 아무도 탈레반이 왔으니 도망쳐라고 대놓고 소리치진 않지만 대충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입모양만으로 벙긋벙긋 "님 얼른 가야 함 ㅜㅋㅋ"이라고 하면 곧 들이닥칠 거란 뜻이기 때문에 알아서 눈치껏 튀어야 한다. 그들의 규범에 따르자면 남녀가 한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는 것도 불건전하고, 남녀가 악수를 하는 것 또한 불건전하고, 남녀가 같은 차에 타고 이동을 하는 것도 불건전하다. 나는 평소에 유엔 컴파운드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롭지만 (그래도 이성 간 악수는 안된다) 아프간 현지 여성 직원들이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데이터를 수집하러 인터뷰를 나간 현지 여성 직원들이 구금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는데 체포 사유는 여성은 현행법상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조항이 통과되던 날의 일을 나는 매우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웃으며 퇴근했던 여성 직원들이 당장 다음날부터 사무소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휑하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허망하게 바라봤던 어느 날의 일이다. 누군가는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탈레반의 요구를 들어주면서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지원 활동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일은 정치적 협상을 위한 카드가 되어선 안된다고 하였으며, 누군가는 유엔의 철수 여부는 탈레반에게 아무런 타격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답이 없는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불안감이 아른거리는 형태로 눈에 비칠 듯 떠다니는 나날 속에서 나는 그저 내 손에 남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모니터링 리포트를 끊임없이 적어 내리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전 03화 카불 컴파운드에 갇힌 유엔 직원은 주말에 뭘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