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이 걷히고 존재의 베일을 벗으려 할수록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감이 찾아온다. 인간인지라 모든 관계를 다 청산하고 끊어내고 싶은 심정이 목구멍 위로 올라올 정도이다. 이해할 수는 없다 치더라도, 듣기를 요구할 수 조차 없다. 기대감을 가질 수 없다. 이해의 역량은 그렇다 치더라도, 안드로메다로 들려버리는, 그 영혼 없는 리액션과 침묵의 떠버림을 잠자코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어떤 날의 이해받지 못함은 칼날이 서듯이 가시 돋치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눈빛과 말들에 공허감을 부추기고 공허감은 속절없이 흩뿌려진다. 이해를 작동시키려고도 하지 않는 가혹함에 맘이 텅 비어버림과 동시에 그 텅 빔으로 더욱 무겁게 추락한다. 물론 내면의 요구와 방식을 강제할 수 없음을 안다. 내가 너무나도 안다. 상황을 강제 종료시키지 않고도 괜찮을 유일한 방법은 그저 이해를 기대하지 말아야 할 테지만, 기대를 비워도 괴롭기는 매한가지다.
여태껏 이해받지 못할 때 난 고통스러운 사람이었다. 이해 갈구자이자 이해 갈망자였다. 이해받고 싶었으나, 이해를 구하는 것에 좌절하고 포기해온 사람이다. 어떤 날은 기대하지 않았고, 많은 날은 괜찮았다. 이해했다. 그럼에도 어떤 날은 더 말을 하지 않아도, 질문을 더 이상 던지지 않아도, 상황을 강제 종료시켜도 그 무엇으로도 달래지지 않았다.
달래지지 않던 어떤 날은 스스로 욕구를 해결할 수 없는 무력함이 올라왔다. 이해할리 만무한 상황과 사람들로, 현실의 제약조건들로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인식이 실현을 더욱 가로막았다. 이제는 더 이상 포기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던히도 혼자이고자 한다. 고독이 찾아오지만 이는 스스로 날갯짓을 하여 날아오르기 위함이다. 스스로 구하고자 함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바깥세상에서 구함은 필요치 않다. 스스로 탈피의 과정, 올드해진 자아 제거작업이라고 할까? 최종적으로 도달하기 위한 빚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 이해가 고팠던 날들이 있었나요? 어떻게 보내오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