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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 et Moi Aug 10. 2020

나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지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그런 건 없다. 나를 나답게 해 준다는 건 없어. 나답다는 건, 나답다고 자의식을 갖기도 전에 일어나는 것이고, 나답지 않다는 건 나답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가거나, 아예 모를 수 있으니까. 더욱이나 보통 대게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나답다는 것, 나답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어? 게다가 정말 나답다고 느끼는 것도 사실 나가 아닐 수 있다는 엄청난 함정도 도사리고 있어, 이럴 땐 정말 처치곤란이지. 엄청난 착각이자, 괴리일 수 있어.


  나를 나답게 해 준다는 건 어떠한 것들로 급작스레 뿅 이루어지는 게 아니야. 그럼에도 나를 나답게 해주는 건, 바로 그 어떤 모든 방해와 방어막이 발동이 걸리지 않는 상태가 아닐까? 방어막이 아무리 높디 높고 철벽마냥 강력해도 사르르 순식간에 녹여버릴 만큼, 방어막이 한방에 사라지게 할 만큼 강력한 것 그것이 나를 나답게 비추고 빛나게 해. 


  우리네 삶은 그렇잖아. 살아가면서 점점 방어막을 생성하고, 발현하고, 결국 어떠한 모종의 상황과 관계 속에서 자꾸만 방어막을 구축할 때도 있고, 높게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방패처럼 내세울 때도 있고, 방어복처럼 켜켜이 껴입을 있을 때도 있고, 칼처럼 휘두를 때도 있고 이미 굳어질 데로 굳어져서 들러붙을 때도 있고, 방어하면서도 방어하지 않는다고 부정할 때도 있어, 심지어 방어막에 둘러쌓여 방어하는지도 모르지... 물론... 그래도 다 나인데...나지.


  그래서 어쩌면 나답다는 건... 그냥 편하고 자연스러운 거야. 자연성이 살아있는 거야, 어떠한 의도도 목적도 바람도, 욕구도 의식할 찰나도 없이 그냥 그러한 것이야. 그냥이란 말이 쉬워서 말하고자 하는 내포하는 의미를 설명하지 못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들의 빛나는 눈동자 같은 거야. 거리낌 없이, 걸림 없이, 방어 없이, 잦은 고민과 생각, 휩싸이는 감정이 없이, 스스로에 대해 압박이나 억제, 누름 없이 살아있는 대로 움직이는 대로 원하는 대로, 내 안에서 펼쳐지는 대로 오롯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나다운 거지.


  나 다울 때의 표정과 눈빛과 태도는 아주 아주 빛나. 너무나도 아름다워, 잘 조율되고 잘 닦인 악기처럼, 나다운 사람은 그 사람의 맘이 목소리가 저절로 귀담아 들리고 눈길이 가고, 궁금해지고 얘기하고 싶고, 어떤 모종의 아우라라고 할까? 그러한 것들이 감지되지. 그럴 때, 자신에게서도 상대에게서도 그런 순간들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만나본 적이 있을까?  


 아마도 잘 없고, 뭔지도 모를꺼야. 그게 뭔지!! 그런데 나 아닌 것에 나를 가로막지 않고, 나라고 착각하지 않고, 자의식도 없이, 자연히 있는 그대로 스스로 원하는 대로 감정과, 생각과 행동이 일치되어서 태도로 뿜 뿜 거릴 수 있으려면, 당장 바로 나다운 대로 행하려면... 어렵지. 어렵고 말고. 엄청난 상황과 환경적 압박과 압력 그이은 시선과 눈치, 스트레스가 있다면 그럴 수가 없을 테니까. 대게는 여기서 장벽처럼 그물처럼 다 걸려버리니까. 그런데 그래서 결국 나답다는 건 말이야. 나답게 빛나는 건 누군가로 인해 비치고 발현될 수 있는 거야. 혼자서 빛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나답다는 게 왜곡되고 삐걱거렸다가는..그저 독재이고 독단이고 위선일테니까.


  그냥 나가 나라서 나이고, 나다운 게 아니라,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건 결국 관계, 누군가로 인해 빚어지는 거야. 물건도 그렇잖아. 누구를 만나서 어떠한 맘으로 대해졌느냐에 따라, 그 물건은 때깔이 달라져. 뿜어내는 게 달라지거든. 그저 흘러버린 시간이 아닌, 시간성 속에 무언가를 역사로 쌓아온 것이지. 발효와 부패의 차이이고, 빈티지와 무쓸모의 차이지.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상황적 압력과 스트레스를 뚫고도 나다울 수 있는 건, 결국 나다운 순간들을 축적하고 경험했기에 또 그럴 수 있는 거야, 내지를 수 있는 것이라 할까? 그런데 그게 아주 의외적이더라도, 어떤 이질감과 불편감이 일어날지언정, 아주 신선하고 새롭게 공감되고야 마는 거야. 그런데 또 이런 내공이 쌓이려면 그러한 관계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시작점은 사실 누구라도 될 수 있지 않겠어? 처음에는 오잉? 불편하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인정되어야 하니까. 그저 존재를 인정하는 거라고 할까?


  지금도 나답다는 걸 중요하게 부르짖고 있지만, 정말 나다울 수 없기에 이토록 부르짖는 거 아닐까? 그리고 사실은 나답지 않은 게 더 편하고 쉬운 거 있을 수 있어. 더 간단하니까. 모종의 매뉴얼과 상황에 따라 눈치껏 행동하면 되니까. 게다가 이미지로 얼마든지 연출의 신공은 가능하니까. 보여주고 싶은 대로 보일 수도 있고 상대가 원하는 정답만 골라 말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게 나라는 착각이 형성되고, 이는 또 비난의 타깃이 돼버리고 말지, 위선은 드러나고 가식은 들통나고 부자연스러운 건 티 나니까. 


  아무리 연기가 찐이어도 길면 밟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피곤하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나대로 살고 싶지만 살 수 없고... 맘 속 어려움은 가중되 악순환 기로로 들어서니 다시 부르짖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결국 또 사람이고 상대야.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야. 부족한 것도 취약한 것도 구린 것도. 다 나지. 이를 투명하게 바라봐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하고, 원해. 슬프지만 이렇게 우리는 너무나도 목마른 상태야. 그래도 희망적인 건 그런 사람이 기대치만큼 당장 없어도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떠한 경험 속에서 배워나가고 자각해 나갈 수 있어. 그리고 당장 나부터 누군가에게 그런 대상이 되어줄 수 있고. 쉽게 말하자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케미 혹은 관계성이 달리 빚어지고, 이에 따라 서로와 자신의 반응과 피드백이 달라지듯이..


  만약 경험과 만남의 과정 속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의 변수가 될 수 있는 끊임없이 생동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거야. 그리고 나다운 관계와 삶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될 거야~찐 텐션과 케미를 발현하게 하는 상대와 자신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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