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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Inner Life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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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 et Moi Dec 31. 2020

디스토피아 대한민국

사냥의 시간 그리고 스위트 홈

  '사냥의 시간'과 '스위트홈'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선보인 작품은 대한민국이 맞이한 몰락, 부정적인 암흑세계를 전제로 한다. 픽션이지만 가벼운 듯 무겁게도 디스토피아 세계는 현실의 부분을 극대로 극화하여 실사화한 반영이다.     

 

  영화 속 대한민국 사회는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사냥의 시간은 경제적 몰락으로, 스위트 홈은 감염병으로 말이다. 그리고 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상실된 혼돈상태에서 그저 생존을 위한 숨만 쉬며 살 뿐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스위트홈 맨션 안에서는 감염되지 않고 살아있다는 감사함으로 살기 위한 수단으로 갈등 에서 룰이 작동하나, 사냥의 시간에서는 이미 대한민국 화폐가치는 폭락하여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아노미에 가까운 사회에서 살아갈 길이 깜깜하다.


  사냥의 시간에서 인간으로 제대로 살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지옥이 되어버린 한국을 탈출하는 것이다. 스위트홈은 바깥세상으로 탈출조차 어렵기에 일단 생존이 목적이 된다. 그래서 살기 위해 갇혔다. 두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극명하게 시대와 사회를, 사람을 조명하고 있다. 픽션으로 현실감을 다소 축소시켰을지 몰라도, 그래서 더욱 감각을 촉수를 세워야 한다.


  한 편 한 편 들여다보겠다. 우선 사냥의 시간에서 청춘들은 무규범 세상에서 동물적 본능으로만 살아야 하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에 처해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게 가능할 턱이 없다. 암울하고 우울한 빛으로 둘러싼 세상에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던가, 어떻게든 불법이라도 발판 삼아야 할 뿐이다. 왜냐하면 추악한 욕망은 뻔질나게 득실거리면서도, 일반적인 생활을 위한 욕망 도무지 쟁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창창하게 젊은 날에 이상은커녕, 됐고, 소소하고 평범한 인간적인 욕망조차도 정상적인 수단에 의해 성취할 수 없고 모든 길목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짱구 돌려서 나올 거라고는 더욱 치밀해질 범죄다.


  그렇다고 이 4명의 소년들이 범죄를 계획하고 저지르기까지, 대담하게 자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 함께하는 친구들 덕분이다. 우정 덕택일까? 감방에서도 계획하며 심혈을 기울인 덕분일까? 우정으로 다져진 팀워크 덕분일까? 성공적으로 도박장에서 달러를 탈취한다. 그러나 성공을 만끽하며 이상향을 꿈꾸는 것도 잠깐이다.

      

  집요하게 따라오는 ‘한’(박해수) 그는 누구인가? 처음에는 ‘한’이라는 인물은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무참히는 쫓는 행동의 동기는 도대체는 무엇인가? 좀 잡을 수 없다. 돈 때문인가? 하드디스크 때문인가? 아니 이유는 없다. 그저 ‘한’은 사냥을 할 뿐이다. 게다가 ‘한’은 저 세상 영역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대항할수록 대응할수록... 더욱더 집요하게 옥죄어 올뿐이다. 더 심한 장난질로 박차를 더할 뿐이다. 그리고 4명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돈을 써보기도 전에 목숨이 위태롭고 공포에 휩싸인다.      


  윤성현 감독은 독립영화인 파수꾼에 이어 사냥의 시간에서도 10대의 정서를 그린다. 사실 20대가 된다고 바로 10대의 정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기 청년기 초중반을 지배한 그 강력한 정서를 그려 재차 느끼게 해 줌으로써 뭔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정서의 강력함은 얼마나 지배적인지 누군가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는 계속 맘 구석 어딘가에 부분적으로 남아 현재까지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대게는 잠잠하더라도 쉽사리 돌출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사실 10대의 정서를 밑바탕에 깔고 펼쳐지는 서사는 사회에서 꼭 짚어야 할 부분이다. (영화 '화차'만큼이나 사회에서 눈을 부릅뜨고 본질적인 개입이 필요한 영역이다.)


  대략 10대 정서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러한 정서는 대략 청소년기부터 작동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서를 말로 글로 설명하기란 간단하지만은 않다. 모두가 마치 없었던 일처럼 혹은 그저 의례 겪고 넘어가야 할 정서상태로 가볍게 치부하기에 여태까지 끌고 왔다. 그런데 그렇게 통용되는 대로 의례적이지도 가볍지도 않다. 이러한 정서 상태에 빠지는 것은 가치판단을 떠나, 모종의 대한민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상황적, 환경적 압력이 작용다.


  예를들어 영화 비트를 시작으로 이러한 10대의 정서를 일탈, 비행으로 표현한다. 물론 일탈, 비행은 세계 각국 어디에나 있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서는 일탈, 비행은 결도 색도 다르다. 지금껏 이러한 정서는 불안하고 방황하는 청소년이라고 자주 표현했으나, 그 불안의 밑면과 심층을 들여다보면 아주 복잡 미묘하다. 그리고 그 불안을 던지는 것이 이 세상 이 사회이다. 그리고 세상은 말한다. 그 불안을 각자가 알아서 메우라고! 불안은 당연한 것이라고!

      

  결국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에 이은 '사냥의 시간'은 학교라는 공간을 대한민국 공간으로 확장이다. 학교야 말로 대한민국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세상 원리가 작동한다. 그 원리란 일종의 공정한 경쟁이라는 전제하에 집단 내에서 서열화, 계급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등급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룰의 지배하에 통제되고 길들여진다. 파수꾼에서는 학교, 교사, 사냥의 시간에서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다. 세상 속에서 이미 룰은 딱히 공정하기보다는 불합리하기 작동하지만, 경쟁에서 승리하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막연한 미명 하에, 아무래도 세속적 욕망은 모두 이룰 수 있다는 전제하에 세뇌되어 길러다.


  그럼, 이러한 질서에 포섭되거나 도무지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은 어찌해야 하나? 가축과 같은 등급화에서 등급조차 매겨지지 않는 존재들은 어떡해야 하나? 존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존재적 가치는 없다. 점수로 매겨지는 이 작은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 획득하는 수밖에... 바로 관계 내에서 조직하고 힘을 키우는 수밖에... 그래서인지 파수꾼에서 기태는 찐 친구와 노는 친구가 분리되어 있다. 찐 친구인 그들의 학업에 방해를 하지 않겠다는 모종의 의리 같은 거라 할까? 동시에 일진 서열 1위, 대가리인 파수꾼의 기태는 비록 스무 살이 되면 연기처럼 사라질 학교 내 사회적 지위라도, 땡 되어버릴 일진이라는 지위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럼 다시 반대로 파수꾼에서는 전형적인 일탈로 치부된 면모가, 사냥의 시간 사회에서는 어떻게 보이나? 파수꾼의 기태(이제훈)는 자살로 마감했지만 사냥의 시간에서 준석(이제훈)은 감옥에서 출소하며 시작함과 동시에 헬조선 탈출로서 범죄를 꿈꾼다.

      

  그럼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파수꾼에서는 전형적인 비행이라 비치는 행동들이 정말 일탈일까? 비추어지는 것과 달리 오히려 탈출이자 숨구멍이지 않을까? 사냥의 시간에서 범죄는 그저 범죄일 뿐인가? 사회적 맥락과 사회적 책임을 무시한 채, 단순히 탈취 행동만 보고 책임여부를 온전히 개인에게 몽땅 물을 수 있을까? 그저 독단 행동? 경쟁에서 도태된다면 그저 찌그러져서 살아라? 누구 그리 폭력적으로 억압하는가? 사회가 시대가 해야 할 몫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사냥의 시간에서 4명의 주인공은 세상 자체가 인간적인 삶에 도무지 참여할 수도 없고, 참여한들 답 없는 희망 없는 판이기에 참여하길 거부한다. 그저 인간적 삶이 보장된 이상향으로 이주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삶에서 끈덕지게 희망과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이는 곁에 있는 친구들 뿐이다. 가정과는 연결과 유대가 끊어진, 혹은 미약해진 상황이고, 그 유일한 끈, 정서적 끈은 내 옆에 있는 친구다. 비록 파수꾼의 우정처럼 미숙하더라도, 그래서 회색빛 세상 속에서 더 찬란한 그 시기만의 우정이자 유대감이다.  


  사냥의 시간에서 그려지는 세상은 파수꾼의 소년들, 그리고 대한민국 청춘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확장이다. 일종의 세계관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처참한 심정이 들지만 대다수가 공감할 만한 그림이자 색채가 아닌? 어느새 어른이 된 자들은 흐려졌겠지만 그 시절 느꼈을 감정의 색깔... 당시 세상에서 존재감도 인간적 감정을 느낄 수 없기에, 옆에서나마 인간으로 존재로 대접해줄 관계를 온정을 우정을 기대하고 원다.


  아무튼 빡빡하고 건조한 삶은 굴러가고 그 와중에 공정하게 경쟁한다고 사회적 게임판에 입장을 시켜버린다. 그런데 가만 보면 세상이 말하는 강박적이고 지배적 룰은 세속적 힘을 가진 자들에게만큼은 자기 이익과 감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펜스 하며 움직인다. 그런데 왜 그 룰을 지켜야 하는가? 왜 지배할 대상에게는 엄하게 강박적으로 다루어지고 마는가? 그건 법이자 규범, 규칙, 판단, 평가 그 모든 것이다. 그리고 뭔가가 아주 중요한 게 쏙 빠졌다. 아마도 사냥의 시간이 스릴러라는 장르를 표방한 속내 아니겠는가.


  사냥의 시간이 가장 혹평을 받은 지점 사냥꾼인 한의 밑도 끝도 없는 사냥이다. 그런데 '한'의 의미도 목적도 이유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쫓음이! 이 말도 안 됨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장르적 표피를 벗겨도 제목 그대로 사냥의 시간일 뿐이다. 이유가 있는 듯하나, 이유 없이, 유도 모르게 내몰리고 있는 내쫓기고 있는 청춘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실사화일 테니 말이다. 막연히 이유가 있을 거라 청춘은 예상하지만... 이는 또 영화 '돈'의 '번효표'(유지태)를 떠오르게 한다. 돈 때문도 아니고, 뭐도 아니다. 그저 맘에 안 들고 심심할 뿐이다. 그리고 또다시 스위트홈의 차현수를 괴롭히던 차현수 아빠 회사 사장 아들인 도훈을 떠올리게 한다.

  스위트홈의 차현수가 경험한 학교도 그랬다. 준석이 기태가 경험한 그대로다.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룰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다.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 인간성에 의한 평가와 판단은 상실했다. 사회로 확대하면 세속적 가치에 따른 불건전한 서열과 계급을 양성하면서도 경쟁에 의한 올바르고 바람직한 상식적인 룰이라는 환상과 세뇌에 주입되어 현대인은 사실보상 욕구만 커지고 말았다. 도훈의 지시대로 현수 친구가 보상을 위해서는 차에 뛰어들라면 뛰어들 만큼 말이다. 이러한 행태들이 팽배하고 암묵적이면서도 공식적 룰로 작용할수록 건전하고 생산적인 인간적 욕망이 자라날 수가 없다. 무조건 세속적 욕망이 나쁘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님은 분명히 밝힌다. 빠진 그것. 그것을 보자는 것이다. 그럼 다시 차현수를 봐야 한다.

      

  차현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롭힘으로 인한 학교폭력의 희생자였으나 그나마 믿었던 가족에게도 외면당한다. 가족조차 이해하지도 돌보지도 응시하지도 않을 고통을... 묵묵히 가족을 위해 참아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한심한 놈이라는 평가뿐이다. 당연히 극복할 것이라고 극복하기를 믿었다는, 버티라고 말하던 그까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저 인생을 스스로 망치는 것일 뿐이라는.. 그 끔찍한 고통을 가족이 무효화시켜버렸다. 결국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던 차현수는 빛을 잃었고 맘의 문을 꽁꽁 걸어 잠가 닫았고 자살을 희망하게 된다. 이렇게 친구들만이 아닌, 가족의 외면은 결정타였다. 예전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좌절,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폭력은 없지만 어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여기서 가해자 처벌, 폭력 심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룰은 왜 존재하는가? 이는 또다시 스위트홈, 편상욱 과거의 트라우마와도 겹친다.


  스위트홈의 도훈은 차현수뿐 아니라 반 친구들에게 전교생에게 악 덩어리와 같은 전염력이 강한 엄청난 해악을 가한다. 반 친구들에게 인간적이지 않을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대다수는 이를 따른다. 반 친구들은 영혼이 없는 주관이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이렇게 인간 차현수는 학교생활에서 장난감 혹은 사냥감이 되어 인간적 존엄은 처참히 짓밟혔다. 그리고 끝끝내 겨우 알게 된 고통과 고난의 원인이 너무나도 허무하게도 계산 없는 환한 웃음으로 건넨 친절이었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가?


  도훈이 말한 대로 하늘이 너무 맑으면, 감히 쓸데없이 친절했다면 폭력의 희생물로 바쳐질 이유가 충분하다. 아니, 현수는 얼마나 해맑았으면 1인자와 같은 막강한 도훈의 존재를 몰랐을까?그리고 학교 생태계와 같은 근간이 어디가겠는가? 복붙으로 사회에 적용해 해석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고도의 압축 성장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상식적이고 인간적으로 접근했다가는 벼락 거지가 되거나, 뒤통수 맞기 십상인 역사를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압축 성장한 열매의 과실을 먹는 건 복불복이 되어버렸고, 계층화에 따른 정당화로 울타리를 쳤다. 이렇게 노골적 욕망에 편승하지 못하면 무지렁이가 되었다. 맹목적 욕망의 화신들이 판치는 세상... 그 욕망 속에는 인간성은 없다.      


  스위트홈은 인간은 '무한한 욕망의 질병'에 걸리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병은 인류를 멸망시킬 악에 가깝다. 그래서인가? 대다수의 인간은 감염되어 욕망이 드러난 모습으로 갖가지의 괴물이 되어 인간을 죽인다. 괴물의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이루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한 욕망은 악이 된다. 근육으로든 눈알로 든 촉수로든... 하지만 스위트 홈에서 인간만을 집요하게 노리는 괴물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 회가 거듭할수록 인간임에도 인간의 탈을 쓴 괴물과, 괴물이지만 해치지 않거나 도움을 주는 인간적인 괴물, 말 그대로 괴물뿐인 괴물. 반은 괴물 반은 인간? 이 등장한다. 욕망에 삼켜진 인간은 괴물로 변하는 게 어찌 당연한 절차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진정한 괴물은 무엇인가? 묻게 된다. 그리고 괴물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간직하고 갖춘 특이 감염자 차현수가 있다.


  차현수의 존재는 질문을 낳는다. 과연 괴물로 변하는 자와 인간의 모습을 한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스위트홈은 욕망을 드러내면 괴물이 된다? 고 말한다. 다시 바꿔 말한다면 욕망이 인간을 삼키면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망,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채워도 채워도 허기지는 욕망은 진짜 욕망이 아니다. 진정한 욕망이 아니다. 하지만 거의 대다수가 변하질 않을 소망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가짜이지만 맹목적 욕망에 눈이 멀었고 인간으로서 욕망 이면의 인간적 소망을 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임명숙이 아기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에 태아가 되어버리는 것이 진정 자기의 욕망일까? 비록 인간에게 해는 끼치지 않았지만 그 욕망 이면의 너머에 진정 바라는 것은..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막연하고 맹목적인 욕망의 무서움이다.      


  소명을 잃은 힘과 욕망은 결국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것이고, 악의로 가득 차는 것이고 그 잔인함의 끝은 소멸시키는 것이다. 욕망 끝에 시체가 되지 못하고 괴물로 변한 채로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로 주변을 사람을 파괴한다. 도훈처럼, 한 처럼 별 이유는 없다. 도훈처럼 쉽게 얻은 넘치는 세속적 욕망이 가리키는 건 쉬이 쉽게.. 맘에 안 든다는 것이 다다. 눈 앞에 보이면, 들리면, 그게 다다. 그렇게 인간성을 잃고 얻어가는 건... 무엇인가? 그리고 그릇욕망실현괴물이 되어 그저 환영에 지나지 않는 가짜 세상에 머물면서 현실 세상에 해악을 미치는 욕망 괴물들은 어떡해야 하는가? 어찌 보면 시대를 반영하는 영화적 흐름도 현대인을 그려내는 방법으로 영혼을 잃어버린 좀비 떼에서 이제는 욕망에 집어삼켜진 괴물로 흐름을 바꿔 타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이제 차현수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스위트홈에서 차현수는 특이 감염자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인간적인 면모로 악마적 속삭임에 대항해서 싸웠고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자살'의 이면의 의미가 '살자'이듯이 억울하다는 감정에서 파생된 그저 살고 싶다는 외침으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한 것만은 아니다. 정신력에 따라 추한 괴물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진화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의 변이의 능력을 갖춘다는 으로 새로운 해석의 포문을 연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막연한 욕망으로 인간성을 잃고 괴물로 추악해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찍소리 안 하고 감내하는 사냥개로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시즌1 마지막 회에서 각성 이후 다시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고 거듭날지 그 폭력 속에서도 살린 인간성을 어찌 간직할지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괴물화되던 차현수를 안아주던 한두식과, 죽음을 맞이한 한두식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억을 잃었어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던 현수처럼, 진정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이토록 흥미진진한 서사와 함께라면 더더욱 재미있게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자살이 아닌 살! 자!로 이끄는 그것 , 변모와 각성, 인간간의 애착을 불러오는 그것을 말이다. 두 편의 작품 속에서 모종의 맞물리는 이야기가 느껴진다면 시대적 사회적 지배적 영향력에서 탈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생존은 여전히 인간화의 진행 여부에 달려있다. ' -에릭 호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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