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했던가? 그 먼 옛날부터 그리고 여전히 여자 팔자는 남자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된다고 여겨진다. 현대까지도 여자 팔자 남자 하나 잘 만나면 된다는 식이 암암리에 퍼져있다. 그래서인지 지금껏 여성 서사야 늘 뻔했다. "왕자님을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침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게 안 된다면? 헌신적 내조로 바보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던가? 그래서일까? 동화 속 공주 이야기와, 바보 온달 이야기의 변형일 뿐인 드라마는 지금도 왕왕이다.
요즘에 이르러서야 주체적이고 독립적 여성들이 드라마에 나름 보인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실 속 여성들은 여전히 관계에서 의타적이어야만 한다고 사회가 요구하고 스스로도 요구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가치 증명은 남자에 의해 정립하려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래의 3장의 사진은 작가 니키리의 Parts 시리즈로 사귀고 있는 남자에 따라 달라지는 여자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Parts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또다른 예로는 영화 '우리 선희'를 들 수 있다. 영화 '우리 선희'에서 주인공인 선희는 과거 썸띵내지 교제했던 이성과 관계로 존재가치를 입증해 왔고 그래 왔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에도 선희는 과거 3명의 남자들에 의해 복기되면서 '우리 선희'가 된다. 그들이 말하는 그 시절의 우리 선희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오늘의 선희를 포괄하여 설명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보통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대학 재학 시절의 선희도 남자를 통해 남자에 기대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재확인하고 그들의 눈을 통해 자신을 알아갔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백조로 지내면서 동굴 속 홀로의 시간조차도 끝끝내 자신을 알지 못하고 불분명한 정체감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홀로 보낸 백조 기간 동안 선희는 분명 달라졌다. 왜냐하면 선희는 미래를 향한 결심으로 유학 길에 오르기 위해서 추천서를 얻기위해! 과거의 남자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요와 목적에 의해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고야 만다! 수동적이고 의타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자 진정으로 자기 찾기를 시작한 것이다.
영화 결말에 이르러 짠한 남자들 뒷모습 뒤로 우리 선희만이 아닌, 스크린 밖에서 스스로가 증명하는 나! 선희를 발견하고 만들어 갈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온다. 선희 자체로 삶을 기대한 채 끝남과 동시에 전형적인 여자를 탈피하기를 응원하게 한다.
그럼, 우리네 현실 속 여자들은 어떨까? 사회생활 시작은 선희처럼 직업전선에서 뛰어들어서 어떻게든 자신만의 직업적 정체성, 커리어를 쌓아가거나 쌓으려 분투한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어찌어찌 결혼 혹은 취업하여 생활을 잘 영위해도 자기를 찾지 못하면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든다.
여성에게 이른 결혼은 취집이라는 말로 격하되어 있고, 확실한 커리어 보장 없이는 출산을 한 후에는 82년생 김지영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자 나이 삼삼한 수준을 넘어서도 분명히 정립되지 않은 커리어, 혹은 미래 보장이 불투명하다면 당장에 결혼을 하는 게 수지타산이 맞다고 보기 시작한다.아무래도 자녀 생산이 삶의 자국을 남기는데, 존재감을 갖는 데는 더 낫다는 결론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마냥 결혼을 미룰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자고로 팔자 좋은 여자의 삶이란 돈 많은 남자 만나 사랑받고 내조하며 사는 것이라는 암묵적 공식들 속에서..., 차라리 백치미 금발로 상징되는 여성이 되는 게 속 편한 것인지도 모른다.적어도 선택? 아니간택될 확률은 높으니 말이다. 이러한 지배적 룰이 암묵적 혹은 공식적으로 팽배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남성들이 바라는 전형적 현모양처가 가득한 스텝포드 마을
고로 현대 여성들이 시대와 사회가 주는 억압과 고정적 성역할의 해방을 외치면서도 도로 다시 얽매여야 행복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아마도 다시 도착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도돌이표와 같은 딜레마에서 많은 여성들은 결혼, 출산, 모든 것을 유예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건 아닐까? 아직 풀지 못했던 들 여전히 현대의 여성들은 온전히 독립을 하여 살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남성에 기대기보다 오롯이 본연의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서는 뒤웅박 팔자를 거부함과 동시에 동일시하고 있는 이 현상을 타개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