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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Inner Life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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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 et Moi Nov 01. 2020

너와 나의 관계성

관계 역학

  세상에는 수많고 많은 다양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통신으로 연결되듯상호 간을 연결하는,  이동하는 일종의 흐름, 운동이 있다. 혹은  주파수, 신호라 불릴 수 있다.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만남 속에서 연결되고 어긋나며 흐르는 일종의 양, 속도, 강도를 달리하며 움직이는 현상이다. 이는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성질과 방향을 나타내는 무언의 힘이자, 연결성의 형태를 이룬다. 관계성을 빚어낸다고 할까?


  관계성은 강도, 리듬, 종류는 달라도 만남으로 주고받는 자극과 반응 사이의 흐름, 공기 중으로 빚어내는 에너지 혹은 기류는 결코 숨길 수 없다. 차오르는 에너지 자체가 다르다. 아무 행동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분출되고야 만다. 이를 가장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직종이 있다. 바로 배달원이다. 현관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무언의 공기만으로도 포착 가능하다고 전해진다. 방문한 집이 따뜻하고 화목한 온기가 밖으로 흘러나오면 찰나라도 에너지를 더 듬뿍 받고 싶은 맘까지 생길 정도라 한다. 결국 손에 잡히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가정의 단위로나 집단 관계성이 만들어내는 모종의 문화, 풍토, 분위기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흐르는 분위기를 자꾸 접하다 보면 감지할 수 있는 촉수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관계성을 개개인의 만남으로 발생하는 화학작용이라고 일컫기에는 부족하다. 단순히 두 개체 혹은 그 이상의 합이라고는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혹은 여럿이 만나 빚어내는 관계성 그 힘과 종류가 어떠하든, 결국 추동하여 나아가게 하는 건 관계성을 너머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호 간에 주고받는 자극과 반응 사이를 포괄하는 게 있다. 마냥 둘만그들만의 세상이 아니기에... 이를 둘러싼 배경 혹은 세계도 함께 존재하니 말이다. 같은 색도 어느 배경에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느낌과 강도를 전달하는데 관계가 만들어내는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너머서 추동하는 힘을 어찌 말할까?


   마침 이를 명확히 표현해 낼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다음의 사진이다. 둘 사이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 더 나이가 그 사이가 존재의 실체임을 파악해야 한다! 아주 적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대게는 스스로는 관계성이 자아내는 것을 보지 못할뿐더러, 관계가 뿌리내리고 정착하며 만들어낼 세계와, 함께 걸어 나갈 세계의 방향은 쉽사리 도출하지 못한다. 혹은 뻔한 답만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나 연결성을 느끼고 이어지고 관계성이 만들어져도 이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건...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수없이 보아왔듯 현실세계에서 그저 둘만의 스파크와 같은 관계에만 머문다면, 쉽게 관계성이 깨질 확률만을 더다. 그리고 언젠가는 관계성이 숙성되지 못하고 쉽사리 압살 될 운명에 처해진다. 그 아무리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한 끌림으로 시작한 관계라도 말이다. 결국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실체를 보지 못하기에 이러한 씁쓸한 결론에 처해지는 이유이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 혹은 소멸은 영화 몽상가로 예를 들어 볼 수 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세명의 청춘이 등장한다. 이 청춘들은 '영화'라는 공통된 관심사로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미친 듯이 이끌리며 꿈속 같은 나날들을 보내다 어느 날 번쩍하고 꿈에서 깨어나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 탯줄을 자르듯이.. 껍질에서 깨어나듯이... 뛰쳐나간다. 한 몸같이 굴며 지내던 세명의 청춘은 찢어진다. 그리고 관계 안에서 몽상에 머무르는 자와 펼쳐진 세계로 뛰어들어 행동하는 자로 간극이 발생한다.


  결국, 둘 사이에 가장 강력하게 결합하여 끈끈하게 부착되는 애착을 넘어선 둘의 관계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연대와 공동체는 쉽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관계 부침에 시달리면서 관계에 대한 일종의 망상을 품은 끝에 좌절했다. A와 B 사이의 펼쳐질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관계가 아닌, 자신에게만 매몰, 몰입만 시키려 하고 있다. 이에 실패할 때, 더 상처 받지 않기 위함으로 건전한 혹은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자고 외치나, 몽상이나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현타를 맞고 만다. 그러니까 관계성이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는 보지 못한 채, 관계를 둘러싼 무궁무진한 감각을 잊는 것이다. 그저 너와 나로만 경계 지은 채, 망상과 몽상 사이에서 학습되고 길들여져 새로운 세계는 보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망상에 빠진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였어", 부부의 세계


  관계에서 비극이 아닌, 해피앤딩을 구현하는 길은, 목도한 낭만의 종말 끝에 나의 삶을 망치러 온 자가 나를 죽이러 온 것 같은 순간에도, 관계성으로 특유의 질서를 지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때, 서로의 영혼을 자신에게 각인하며 재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강주은 최민수 부부, 서로의 영혼을 각인하다.


그리고 지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강렬하고 충만한 개인적(성적) 관계를 갖는 방법ㅡ유일한 방법은 연인이 주변 세상을 잊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맞잡고 함께 바깥을, 제3의 지점(두 사람이 함께 투쟁하며, 두 사람이 함께 몸담은 대의)을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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