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알 수 없는 삶의 문제에 갇혔다고 느끼는가? 이런 굴레 안에서 고착된 상태로 살아갈수록 삶의 에너지는 차단되고, 엉뚱하고 불필요하게 비생산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문제가 더 불어나기 전에,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전에 고착된 상태, 삶의 제자리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면, 생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갇힌 이유를 응시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응시를 도울 수 있도록 삶의 문제에 갇혀 해결하지 못하는 그 이유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째, 자신의 문제와 정답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스스로 온전히 의식화하여 인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인 질문과 정답에 따르게 된다. 그래서 이미 문제는 규정되어 있고 정답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 평생 살아가며 가장 보지 못하는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지만,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로써 진정한 변화 동기가 유발되기가 어렵고, 오히려 자신의 정답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내려진 결론대로 행할 뿐이다. 따라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만약 재차 같은 생각과 감정에 빠져 계신다면, 같은 문제가 반복되어 나타난다면, 자신을 보지 못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계신 상태이다.
둘째, 한국 사회는 신체적 건강은 중요시 하나 마음의 건강과 성장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시대와 나라가 준 상처도 방관하기 일쑤다. 각자 알아서 처리해야 할 몫이 된다. 상황이 종료되면 상처도 종료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신체적 성장이 멈추면 정신적 성장도 같이 멈추어 버리는 것처럼 여긴다. 인간은 전 생애에 걸쳐 성장 발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 성장과 발달을 등한시한다. 한 사회에 어른이나 어찌 어른답지 못한 사람이 많은지가 이를 반영한다. 그렇게 다들 어쩌다 어른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로 인해 마음의 어려움에 관해 문제의식을 갖기가 쉽지 않으며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신체를 포괄하고 넘어선다. 모든 만병의 기원이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듯이, 오히려 신체적 건강과 활기는 마음이 건강할 때 유지하기가 쉽다는 점을 간과한다.
셋째, 정서적 심리적 개방 경험이 터무니없이 적거나 없는 경우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과도한 체면의식과 시선 의식, 타인 평가에 민감한 문화적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린 시절부터 표현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억누르고 억제하고 만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배우지도 못한다. 결국 다른 시야와 관점을 확보하지 못한다. 입을 막고 살기 때문이다. 꺼내 놓지 아니하고 방어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킨다. 만약 삶에서 어떤 것이 불만스럽게 느껴진 다면, 그것은 신호임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삶이 망가졌다는 신호가 아니다. 단지 내면 탐험의 필요성을 직감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힘을 발휘한다면 다른 세상이 열릴 수 있다.
넷째,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외부 귀인하는 동기화 방식을 가진 경우이다. 자기 확신과 정체가 불분명한 채, 바라는 변화를 위해서는 무언가를 막연하게 기대하며 미묘하게 구원을 원한다. 심하게는 무언가를 우상시하거나 숭배한다. 막연히 헛된 희망을 붙잡는다. 원함에 충족돼도 실패해도 문제다. 원함에 충족되면 더욱 맹목적 미신적 수준에 매몰될 수 있다. 그리고 원함의 충족에 실패하면 남 탓, 상황 탓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모든 것을 외부로 돌려버린다면 삶에서 바뀔 것도 없으며, 본인이 책임져야 할 것도 없다. 이는 손쉽게 책임에서는 벗어나도록 하지만 자신을 수동적, 피해자 관점에 가두는 결과를 낳는다. 내면으로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 그러나 내면세계에 접속해야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다섯째, 대게 인간은 고통을 기꺼이 마주하고 헤쳐나가기보다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 인생사 고통이 없다면 좋겠지만 날씨가 항상 맑을 수 없듯이 필히 어려움에 부딪힌다. 위험과 위협을 마주하면 피하고자 하는 자동적 반응을 보인다. 지금껏 역사와 진화적으로 내재된 본능적이고 반사적인 자기 보호 반응이나 현시대에서는 위험과 위협이 실제적으로 생사를 가르거나 하늘이 무너지는 일은 더 이상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마주하기를 피한다. 마주함으로써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무수한 장애물과 어려움을 또 겪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는 신체적 운동만 해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운동을 하기보다 누워있는 것이 편하다. 인생의 여정에서 마음의 고통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섯째, 고통을 부정하고 외면한다. 자신이 겪는 고민과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며 밀어둔다. 몸이 아프면 당장 병원이라도 달려가지만, 마음의 고통은 무시한다. 아무리 신발 속 작은 돌멩이 크기의 문제라도 지속적으로 신경을 거스르게 한다면 응시해야 함이 맞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통과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생성하는 삶이, 어떤 비용과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우리는 볼 수 있을까? 거의 보지도 못하고 가늠할 수조차 없다. 변화와 고통을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지불해야 되는 대가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실제로 존재함에도 지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잠재성과 가능성을 제한하고 일축한다. 따라서 상당한 값어치로 지불하였으나, 지불했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함에 머물고 만다. 아마도 인간의 가장 큰 죄로 나태함을 꼽는 이유일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게으름이자 스스로 포기하는 저주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면, 고통을 대하는 태도부터 재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섯 가지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였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한 제대로 된 초점을 찾는다면, 자신을 찾을 능력뿐 아니라 자신을 해방시킬 힘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하게 응시한다는 게 어디 쉽나?
작은 이득이라도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 인간이지만, 생 전체에서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면 비록 아프지만 수많은 가능성을 제한해온 절망감을 느끼면 고통 속에 머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희망적 절망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희망적 상태로 나아가는 첫발을 디딜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위의 6가지 이유들로 전혀 해결되지 않는 삶의 어려움에 빠져 정체해 있다가 점차 정신의 나선적 성장을 이루어내며 삶의 궤도를 확장하고 상승 이동하는 영화를 소개한다. 더이상 삶의 고민에 빠져 걱정하기 보다는... 인생의 풍파와 희로애락 안에서 어찌되었든, 새롭게 다시 준비하고 끊임없이 다시 생으로 걸어 들어가며 이루어지는 성장과정이 무엇인지 체감해보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