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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Inner Life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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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 et Moi Apr 11. 2021

인생이 BeBe 꼬일 때는?

부정의 딜레마

 인생이 희한하게 베베 꼬인다? 싶을 때는 모두가 읽어봤을 법한 동화가 쉽고 분명히 그 연유를 알려준다. 두 편의 이야기로 풀어보려 한다. 그런데 그전에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맹점을 볼 용의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들여다볼 것인가?, 들추었다가 덮을 것인가? 아예 열어보지도 않을 텐가? 조금이라도 두려움이 감당되지 않는다면 이 글을 그만 읽는 게 좋다. 물론 읽는다고 갑자기 맹점을 볼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다만 틈새를 열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만약 자신도 모르게 자꾸 인생이 꽈배기 마냥 꼬여가고 엉킨 실타래나 머리카락처럼 엉켜서 풀어나갈 수 없다면, 벌어지고 있는 문제 이면의 내면을 응시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응시할 수 없다면 문제의 무한한 굴레 속에 살아가게 된다. 문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가속화되어 악화되지 않으면 그저 다행이지만, 대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슬그머니 강화된다.


  심리적 어려움을 부정한다는 건 자신에 관한 맹점이 크다는 뜻이다. 팔딱팔딱 생생하게 뛰는 문제를 자신도 모르게 감추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로써 문제는 없는 것이 되었다. 분명 존재하나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을 감췄다. 문제의 부정으로 현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착각과 왜곡은 덤이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맹점이 적은 사람이나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의 눈에는 다 보인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알려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자신은 전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채로 상황 판단이 불가한 채로 이상하거나 힘든 일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문제를 밀어내고 거부해 눈멀었기에 치러야 하는 삶의 비용처리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이지만 감히 경제적으로 환산이 돌아가지 않을 어마어마한 비용이다.

  

  자기 부정과 맹점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을 적절히 설명해주는 동화는 바로 벌거숭이 임금님과 스크루지 이야기이다. 벌거숭이 임금님은 벌거벗었음에도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착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자기 속임이 정당화되어 일은 자꾸 꼬여간다. 벌거벗은 모습을 타인이 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벌거벗었음에도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어서 스크루지는 자신을 절약 가라고 인식하지만 누가 봐도 고약하고 인색한 인정머리 없는 노인네일 뿐이다. 그러다 제대로 자신을 지각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진다. 임금님은 어린아이의 투명한 눈 덕분에, 스크루지는 죽음을 맞이해 벌어지는 꿈 덕분에 현실에 비추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었다.


  동화를 떠나 현실세계에서는 어떨까? 현실에서는 자신이 이미 결코 보지 않기로 했다면 자신과 다수의 타인이 보는 모습의 간극을 좁히기가 어렵다. 아무리 계기가 주어져도 말이다. 그러니까 행여나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이 힌트를 주더라도 결코 입력값이 되지 한다. 애초에 정보처리가   없도록 정보와 각종 단서를 스스로 차단한다. 따라서 눈앞에 빤히 놓아도 보지 못하게 된다. 마치 눈멀고 귀먹은 상태처럼 자신의 자각력을 가동하기를 멈추어 버렸다.  역사적 연유야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로 인해 안타까운  문제의 수준이 노골적이고 낮을수록 더욱더 투명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투명한 존재가 된다는  자각 부재로 쉽사리 타인에게 속내를 쉽사리 간파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투명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빤히 보이고 읽힐 거리를 제공하게 되므로 이러한 경우 자칫 잘못 걸렸다가는 쉽사리 이용당하거나  발로 함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삶의 대가로 겪는 인생의 고행과 상처들은 불행하게도 자신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굴레에서 더욱 갇혀버리고 마는  안타깝게도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자신도 모르게 무례하고 뻔뻔하고 서툰 행위로 드러나, 이를 알려줄 귀인을 만나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불행의 연쇄작용 속에 문제는 더더욱 억압되고 만다.


  그렇다면 맹점이 억압되지 아니하고 자각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드라마 '동백꽃  무렵'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의 현실 적용 판으로 적절한 예를 찾아서 소개한다. 노규태에게 향미는 자신을 오지게 괴롭히는 불면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이다. 하지만 향미는 자신은 벌거숭이 임금님의 ``같은 것이라며 노규태 스스로 발등 찍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향미는 규태가 자신을 향한 흑심을 알아차리고 역으로 활용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향미는 규태의 빤히 보인 속내를 읽었고! 규태는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하다 생긴 일일 뿐이라는 해석이다.  규태는 돈이 필요했던 향미에게 아주 쉽사리 흑심을 간파당한 것이다.


   사건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규태가 자신의 흑심, 사심을   있으려면... 규태 눈에는 원흉뿐인 향미가 알려 주는 메시지와 인생 꼬여가는 지저분한 사건이 알려주는 맹점의 수용 여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서 쓰디 쓴 맹점을 수용할 것인가? 다시 재포장해 감출 것인가? 이에 따라 맹점에 빛을 드리울 수도, 어둠만  짙게 드리우게   있는 것이다. 고로 뒤집기 한판은 바로 원수, 원흉에서 길함을 찾는 것이다.


https://tv.naver.com/v/1026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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