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문제가 없다고 좋은 게 아니라 문제가 없을수록 공허하고, 삶이 밋밋해진다. 살맛은커녕 맹맹한 맛이 지속된다. 그래서 맹탕 단발적 자극이나 찾거나 애먼 데로 빠져들기 쉽다. 혹은 쓸데없는 불안과 걱정의 악순환에 말려들어간다. 정상적이고 건설적 불안을 피하면서 사는 건 정체성 없이, 영혼 없이 사는 것이다.
동물과인간을 결정적으로가르는 건 자기 인식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자기 인식을 얼마나 발휘하며 살고 있을까? 거대한 맥락과 흐름대로 흘러가며 무심코 살아가는일상이 가축처럼 잘 길들여진 거라면? 얼마나 많은 숫자의 사람이 길들여진 삶에서 자기로 살아가고 있을까? 무조건 길들여진 삶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단, 일상의 굴레에서 회의에 빠져든다면, 반복된 삶에 지치고 피폐해진다면, 에너지 고갈을 느낀다면 체력 탓을 할게 아니라 영혼을 자신을 다시 불러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그린 영화가 있다. 바로 영화 '플레전트 빌'이다. 플레전트 빌(pleasantvill, 1998)은 '즐거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영화 제목처럼 마을과 마을 사람들이 등장하지만즐거운 마을이라는 뜻과 다르게 아주 조용하고 아무 일 없이, 충실하고 평화롭게 관습적이고 반복적으로 굴러가는 마을이다.
평화로운 프레전트빌은온통 흑백의 색으로 이루어져서 흑백영화라는 착각을 일으키지만, 사실은 아무 색도 향도 없는 마을 사람의 표현이다.
주인공 데이비드(토니 맥과이어)는 점차 마을에서 이상함을 느낀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매일매일을 아무 생각 없이, 의문 없이, 다들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목격하면서, 차차 스스로도 반복된 일상에 지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데이비드가 자신을 각성하자 흑백에서 컬러를 갖게 된다. 이렇게 플레전트 빌은 일상 세계를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흑백 사람으로 나타내고, 진짜 자기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컬러로 보여준다.
이제는 온통 흑백 사람이 살던 작은 마을에 컬러 사람이 된 데이비드의 영향이 퍼지기 시작한다.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내면의 소리에 반응하고 자기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컬러를 입은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영혼을 지닌 인간이기에 더 이상 거짓으로 살 수 없을 때, 진짜 자신을 도무지 억누르지 못할 때 천연의 색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마을에 문제가 발생한다.
컬러 사람과 흑백 사람은 같은 마을 주민에서 서로 다른 종족이 되어버린다. 다수인 흑백 사람들이 컬러 사람을 배척하고 소외하며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결국 소동과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갈등이 크게 번지더니 흑백 사람과 컬러 사람 사이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져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흑백 사람은 컬러 사람을 심지어 단죄하려 든다.
얼토당토않은 단죄 앞에 컬러 사람은 흑백 사람들이 진실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흑백 사람들은 화를 내고 강하게 거부하기 시작한다.흑백 사람에게는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협이자 위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자기와 감정을 인식하지 못한 채 거짓 감정을 창출하고 자신을 기만해서라도 속 깊은 내면의 소리를 억누르려고만 한다.
흑백 사람은 고정된 관념과 학습된 대로 사태를 인식하여 진짜 '자기'는 없다. 어딘가로 사라졌는지, 가두어 두었는지.. 꽉 막혀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역할과 도리, 의무에만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기존 질서와 패턴을 부정하거나, 벗어나는 것에 무서운 위험과 위협을 느끼고는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신이 숨겨둔 속마음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게 정말 위협, 위험일까? 우리는 얼마나 일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하게 색깔 없이 살고 있을까? 무색무취로 살아가는 것은 어떠한 모양새일까? 우리는 자기 자신과 주변을 돌아봄으로써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내면을 인식한다는 것! 당신은 해방인가? 위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