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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Inner Life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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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 et Moi Nov 01. 2020

삶에서 고통을 마주하는 법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에서 피치 못하게 마주하는 마음의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대해왔을까? 오직 버팀과 견딤만으로 고통을 마주했을까? 그저 고통이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무리 봐도 다들 버티기만 해왔다. 언제부터 한국 사회는 그저 꾸역꾸역 버티며 참으며 살아왔을까? 어쩌면 불행했던 역사적 사실로 눈치 보며 꾹 버티는 것만이 정답이었고, 이 악물고 참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역사를 지나온 것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걸까? 


  이제는 더는 버티며 참기만 하면서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지 않기를 란다버티는 것만이 답인 시대는 지나야만 한다. 아니, 이미 시대는 이미 지났어도 반복하고 있다. 버틴다는 건 생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와 방해를 보지 않은 채, 짐처럼 지고 있는 것이다. 꿋꿋하게 버티며 성실히 열심히 살아간다 해도, 이제는 마음을 도외시하면서 100세 시대를 버티기에는 삶이 너무 길고 길다. 


  버틸 수록, 마음을 도외시한다. 마음을 도외시 할수록 스트레스는 차곡차곡 쌓이는데, 아이러니하게 고통에는 둔감해지고 만다. 이렇게 우리는 더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버티지만 고통에 둔감해지는 결과로 엄청난 손실이 일어난다. 부정적 감정을 마비시키는 결과로, 긍정적 감정까지 마비시키며 악순환의 굴레에 살아간다. 예를 들어 술이나, 약, 중독물질에 빠져 보상 중추를 활성화시키거나, 불분명한 것에 조차 분명한 것으로 둔갑시켜 완벽하고 확실한 것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분명 마음의 아픔에 시달리나 회복되지 못한 채, 정작 삶의 감각과 감정들에 둔감해지는 모순적 상황에 놓인다.


  분명 버티느라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버티기 위해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서만 움직이므로 내외부로 분란만 일어난다. 결정타로 각종 질병 발병에도 취약해진다. 예전에는 화병, 한으로 드러났다면, 요즘 시대에는 수명이 길어진 만큼 갖가지 증상과 질병으로 다양하게 드러난다.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가 차차 누적되어 갈테고,  나이가 들어서는 병원비 폭탄으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버텨왔던 자신을 폄하하라는 뜻은 아니다.


  단 버티는데만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면 고통의 연쇄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무뎌진 고통의 연쇄 과정이 되돌려주는 건 단 한 번뿐인 삶에서 풍성하게 다채롭게 느낄 수 있는 감각과 감정을 차단한 채 살아가게 한다. 그 무엇도 깊게 풍부하게 느끼지 못한 채, 음미하지 못하는 삶이 된다는 뜻이다. 폭넓고 깊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맛있던, 맛없던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못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충격적인건 버티는 데 모든 에너지가 쓰이기 때문에, 개인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터트리고 발견하기 어려워지고 만다.

  

  기적이라면 버티는 상황이 그나마 유지되는 것이고 대부분은 어느 기점으로 상황이 더 악화되거나 개인의 자멸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버티다가도 터져버린 사건들이 또 어려움을 증폭하며 버겁게한다. 잔해를 수습하기도 버겁게 일련의 사건들이 쓰나미로 몰려온다. 저절로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은 없기 때문다. 결국 무한루프임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버티면 버틸수록 자신의 맘을 등한시하며 돌보지 않게 된다. 가두어둔 맘으로 인해 더욱 두렵고, 연약하고 취약해진다. 돌볼 여유가 남아나지 않기에 자신과의 연결성, 즉, 자신과 관계가 나빠진다. 자신과 관계가 악화되어 갈수록 자신과 단절된다. 몽뚱이 속에서 나로 살아가나 삶에 대한 의지와 의욕도 꺾이게 되고, 의미를 찾지 못한다. 자기 연민과 죄책, 자기 비난과 부정, 무감각 무감동에서 자기 파괴에 이르는 다양한 양상이 드러나게 된다.




  마주한 어려움에 정면대응할 수 없기에 버티는 것이다. 그래서 버티나 마음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며 장애에 가로막혀 짐을 둘러매며 버틸수록... 까맣고 회색인 먹구름만 끼인 일상으로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개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크다. 그러니 고통의 심연을 바라봐야 한다. 깜깜한 구름을 들여다보면 먹구름의 가장자리로 희미하지만 빛이 뿜어져 나온다. 이를 실버라이닝이라고 하며, 언제나 구름 뒤로 해님이 숨어있다는 뜻이다.


 구름의 흰 가장자리를 보실 수 있나? 보실 수 있다면 버팀과 고통 너머의 것 그리고 지금껏  버티고 견딜 수 있었던 미처 자각하지 못한 능력과 심리적 자원을 발견하게 된다. 견디고 참기만 하는 것을 넘어서, 인생의 섬광을 찾게 된다. 이를 간접 체감할 수 있도록 마침내 구름의 흰 가장자리를 보게 되는 영화를 소개한다. 각 주인공들의 상처와 아픔에 이입하여 치유 과정을 함께 따라가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자책과 비난, 자기 파괴의 연쇄 고리에서 벗어나, 생의 감각을 회복하고 팔딱 팔딱 숨쉬며 진정 살아가는 자로, 그리고 존재의 기쁨을 느끼는 자로 재탄생하여, 자신이 영위하고 싶은 삶 속으로 생생히 들어가는 눈물 나는 경이로움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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