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문학의 정수에서 긷는 생명사상

[책] 《토지》

by 생태비평가

원래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내가 처음으로 '생태비평'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시절 관련 교양 수업을 들은 후부터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 속에서 생명 및 생태 관련 사상을 톺아본 그 수업은 지금까지도 나의 "최애" 강의로 남아있다. 딱딱한 교재와 이론에서 벗어나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논할 기회를 마련해주셨던 교수님 공이 크다.


그런 교수님께서 방학 동안 토지 전권 읽기라는 과제 아닌 과제를 던져주신 적이 있다. 대학은 방학이 유난히 기니 장장 20여 권에 달하는 토지를 전부 읽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토지는 국문학적으로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라고. 독후감을 쓰라는 말씀도 없으셨고 사실상 종강 후에나 방학이 시작되니 그야말로 안 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과제였지만, 나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토지 1부 1권을 구매했다. (*사실 처음엔 도서관을 노렸으나, 어찌된 일인지(?) 모든 도서관에 1권만 다 대출중이었다. 2권부터 20권까지는 있던데 허허;;)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토지』는 만만치 않은 권수와 방대한 분량만큼 집필에도 26년에 달하는 세월이 소요되었으며 장장 3세대에 걸친 인물들의 이야기가 하동 평사리 최 참판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중심이라고는 했지만 최 참판댁 일가는 말 그대로 이야기의 시작점과 구심점의 역할을 할 뿐, 토지는 80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등장해 지리산자락, 서울, 진주, 만주, 일본, 러시아 등 방대한 공간을 누비며 민중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탈중심적 소설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말 그대로 어느 한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모든 인물 하나하나를 공들여 묘사한 흔적이 가득하단 뜻이다. 다양한 층위의 인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한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 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 준다.


우리는 분명 학교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교육받지만, 연도별로 역사적 사실만 간추려 나열한(*이제는 진짜 정직한 사실인지 여기저기 조작 혹은 첨삭된 역사인지도 모를) 교과서에서 어떻게 그 시절을 살아내야만 했던 민중의 눈물을 발견하고 뜨겁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참된 역사 공부는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한 많고 굴곡진 우리네 역사 속에서 그 역사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맞섰던 인간들의 고뇌와 삶의 의지를 절실히 체험하는 일이 아닐까.


『토지』의 시대적 배경(1897~1945)을 관통하는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의 역사가 그러하다. 이조 오백 년을 지탱해 온 불평등의 역사를 가장 핍박받았던 민중의 손으로 청산하고, 감히 우리 땅과 강산을 넘보는 왜놈들을 우리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피 뜨거운 농민의 반란, 민중의 혁명. 나는 교과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토지』에서 발견하고 패배주의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풍요하고 떠들썩하면서도 가슴 아픈 축제, 한산 세모시 같은 한가위가 지나고 나면 산기슭에서 먼, 먼 지평선까지 텅 비어버린 들판은 놀을 받고 허무하게 누워 있을 것이다.

마을 뒷산 잡목 숲과 오도마니 홀로 솟은 묏등이 누릿누릿 시들 것이다. 이러고 저러고 해서 세운 송덕비며 이끼가 낀 열녀비며 또는 장승 옆에 한두 그루씩 서 있는 백일홍나무에는 물기 잃은 바람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겨울의 긴 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가하면 문장 하나하나 허투루 쓰는 일이 없어 한국어의 말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하기야 우리 역사 우리 땅 우리 강산을 묘사하는 데 있어 우리말만큼 적합한 언어가 어디 있겠는가. 와중 신기한 것은 인간사를 다룬 소설에 있어 흔한 밑그림 혹은 배경에 지나지 않던 자연 묘사가 『토지』에서만큼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엄중한 생명의 집합체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작가의 사랑과 연민, 그로 인해 잉태된 세심한 관찰력이 그대로 뭇 생명, 자연 전부로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벌레와 같이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 하더라도 자연의 순리 안에서 삶의 비애를 떠안고 제 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명에 대한 경외)


이렇듯 탈중심화된 구성 방식, 우리 고유의 동학 사상을 토대로 한 주제의식, 자연-인간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깃든 수려한 문장은 모두 『토지』의 생명사상으로 귀결된다.


어찌 인간만이 그러하겠는가.
모든 생명이 다르지 않다.


『토지』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위 2가지 문구가 그것을 잘 나타내준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정신인 동학의 평등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표방하는데, 이는 곧 반상, 남녀, 노소, 빈부 등 사람 간의 모든 차별에 반대함을 뜻하며,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 이르러 이러한 평등 인식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그 밖에 자연계의 모든 사물로까지 확장된다. 시대적 요구에 발맞춰 돋아난 이념은 천상이 아닌 지상에 존재하며 가장 약한 자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었다. 나 혼자 살면 그만이지 라는 식의 이기주의만 팽배했더라면 전 생명은 진작에 공동체의 고리를 끊고 자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이 보여주듯 역사는 연대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연대는 불가피하고 그것이 삶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혼자 살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먹이사슬의 원리, 곧 생명체의 질서가 대표적인 예다.


짐승이나 사램이나 버러지라 카더라도 이 세상에 한분 태어났이믄 다같이 살다 죽어얄긴데 사램은 짐승을 부리묵고 또 잡아묵고, 호행이는 어진 노루 사슴을 잡아묵고 날짐승은 또 버러지를 잡아묵고 우째 모두 목심이 목심을 직이가믄서 사는 것이까?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의미심장한 원리, 일견 이것은 연대가 아닌 타자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 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보일지 모른다. 죽음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비극이 되겠지.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시작이자 순환을 위해 꼭 필요한 자연의 이치다. 그리고 이 순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 생명평등인식, 생명존중사상이다.


잡아먹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 없이 제 욕심만 생각하고 끝없는 살육을 반복하는 순간, 생의 순환은 깨어지고 만다. 내 삶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인지하고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을 짊어져야만 순환의 기치 아래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생존) 연민은 그래야만 한다는 도덕도 윤리도 아니다. 그냥 생의 법칙 자체에 연민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누가 그러라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마음이다. 문제는 그것을 외면하도록 부추기는 인본주의적 사회 구조다.


생명의 순환을 항시 지켜보며 생의 무게와 생명에의 경외를 스스로 깨칠 수 있도록 하는 자연은 이미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먹는 쌀이 흙과 벼와 햇살의 조화, 그리고 농부의 땀으로 오랜 시간 일구어진 것이라는 사실조차, 돈과 카드와 스마트폰만 있으면 순식간에 얻어지는 현실에 가려 까먹기 일쑤다. 모든 것은 돈, 인터넷 등 "위대한" 물질을 만들어낸 인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돈이 전부가 아닌데도 돈이 전부인 것처럼 보여지는 세상이 왔다. 생명의 가치가 일개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타자의 고통을 향한 연민은 사라지고 연약한 생명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모두를 위해 태어난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대부분 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나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생명에의 경외와 연민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이상, 그게 정말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가? 나 자신의 실존, 그리고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모든 생명에 대해 능동적으로 숙고하는 과정 속에서 삶의 의지가 싹트는 법이다. (*나는 왜 사는가) 적어도 나는 물(物)에의 의지가 아니라 생(生)에의 의지에 따라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다.


어느 제왕이 영화를 한 떨기 들꽃만도 못하다고 하였던가. 인간이 황금으로 성을 쌓아 올린들 그것이 무엇이랴. 만년의 인간 역사가 무슨 뜻이 있으며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인들 한 목숨이 가고 오는데 터럭만큼의 힘인들 미칠쏜가. 억만 중생이 억겁의 세월을 밟으며 가고 또 오고, 저 떼지어 나는 철새의 무리와 다를 것이 무엇이며, 나은 것은 또 무엇이랴. 제 새끼를 빼앗기고 구곡간장이 녹아서 죽은 원숭이나 들불에 새끼와 함께 타 죽은 까투리, 나무는 기름진 토양을 향해 뿌리를 뻗는다 하고, 한 톨의 씨앗은 땅속에서 꺼풀을 찢고 생명을 받는데 인간이 금수보다 초목보다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낫다 할 것인가.


결국 천지만물이 나와 같다. 인간 혹은 나만 생각하고 인간 외 모든 것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모든 생명이 똑같은 삶의 굴레를 짊어지고 산다는 점에서도 한낱 다르지 않다. 개체 간 성정은 모두 다르지만, 먹고 먹히는 사슬에 얽혀 있다는 점도 그러하고 제한된 시간을 살며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도 그러하고, 하여튼 누구나 산다는 것은 애잔하고 애처로운 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삶을 쥐고 태어난 모든 생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두고 제 몫을 해내고 생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다가오는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이 경중 없이 귀하고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저 주어진 생의 시간을 살 뿐인 생명을 생김새에 따라 구분짓고 나아가 생사를 함부로 결정짓는 인간의 만행이 참혹할 따름이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모든 생명을 주변으로 치부하며 이용하고 착취하는 형태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위와 같은 생명사상의 회복이 필요하며 이는 생명감수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생명이라는 토대 위에 놓인 모든 것들의 흉복과 아픔에 공감할 줄 알고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마음. 만물을 굳이 나에게서 분리시켜 보지 않는 시선. 우리 시대 생명감수성의 회복은 지속가능한 생존을 넘어, 약자의 해방과 정신의 치유를 의미한다.


[요약] 『토지』의 중심에는 한사코 인간과 더불어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 혹은 어느 한 사람만을 중심에 두지 않고 써내려간 글의 구성 방식, 동학의 평등사상에서 생명사상으로 뻗어나가는 작품의 주제의식, 모든 생명을 향한 연민이 드러나는 문체 등으로 대변된다. 이 점에서 『토지』는 생명의 근원적·보편적 진리를 탐구하는 소설 그 자체이며, 생명감수성이 필요한 현시점에서 소중하게 읽혀야 할 책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