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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데카르트가 아닌 '틀린' 니체를 사랑하다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생태비평가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의 막바지, 한국 귀국까지 한 달 남짓 붕 떠버린 시간을 나는 '꼼짝 없이' 백수로 지내게 되었다. 수입은 0이지만 주변에서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아주 자유롭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최대의 관심사는 자연·생태이고, 최고의 취미는 글쓰는 일이다. 특히 자연 ·생태를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에 대해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책이든, 영화든, 만화든 그 속에서 창작자 혹은 등장인물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탐구하는 일.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생태비평가가 되고자 한다!! (두둥. 데뷔 선언-☆)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2023)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4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토마시, 순애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염원하는 테레자, 전체주의로부터 달아나고자 배신을 반복하는 사비나, 삶의 의미와 사랑의 가치를 희구하는 프란츠. 이들에게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각각 확대 표상되어 있지만, 서로 만나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모두가 한 번씩은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가를 반복하게 된다. (*가벼운 삶-전체주의적 관념이나 의무,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으며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삶. 무거운 삶-타인을 위한 희생, 연민, 평등 등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며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삶.)


그리고 여기, 테레자와 토마시가 키우는 개, 카레닌이 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카레닌에 대한 재밌는 관점과 해석이다.


카레닌은 잠에서 깰 때 순수한 행복을 느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도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진심으로 이를 즐거워했다.


카레닌처럼, 살아있음 그 자체에 대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적어도 인간의 눈에, 대다수의 동물들은 인간보다 쉽고 단순하게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인간과 아주 가까운 동물, 개는 어째선지 행복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아주 뛰어난 것 같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식사나 산책에도 따분함을 느끼는 기색 없이 행복하게 꼬리를 흔든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 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개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고 인간의 시간은 직선으로 나아간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인간과 개는 분명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바로 이 지점에서 카레닌의 삶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연결되는데...솔직히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a;;


내 나름대로 생각했을 때, 개의 행복과 인간의 행복을 가르는 것은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은 충족을 모른다. 인간은 언제나 이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하고 기대하고 욕망한다. 이번에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했음에도, 다음번엔 이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있겠지를 늘 생각한다. 같은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나은 것에만 만족하고 또 더 나은 것을 욕망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럼에도 키치에 지배당하는 인간은, "같은 곳에만 머무르면 발전이 없어" 라는 식으로 욕망의 확대를 전사회적으로 지지받는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은 하나도 아니고 단순하지도 않다. 심지어 모순된 욕망을 품고 살아가기에, 욕망에 따라 사는 가벼운 삶은 사회적 명예를 욕망하고, 욕망을 절제하는 무거운 삶은 자유로운 쾌락을 욕망한다. 즉 어떤 삶도 인간에게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욕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개와 인간은 동일하니까. 다른 점은, 개의 욕망은 보다 자연적인 것에 가까운데, 인간의 욕망은 키치에 의해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개는 무언가를 욕망할 때, 그것 하나에만 집중한다. 그것은 오로지 개 자신이 원하는 바에 의해 추동된다. 반면, 인간은 무언가를 욕망할 때 자신이 원하는 바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따르는 사회적 시선을 생각한다. 때로는 사회적인 시선이 개인의 욕망을 추동하는 주객전도가 일어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원해서 나도 원하는 건 진짜 자신의 욕망일까? (*타자화된 욕망)


사회적 관념-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보편적이고 단순화된 공통의 진리 (ex.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어쩌면 인간의 욕망도 개의 욕망과 다를 바 없이 한없이 단순할지도 모를 일이다. 반복되는 것에도 쉽게 채워질 만큼.


카레닌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테레자는 그의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했던 것이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이후,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구별된 것으로 여기는 이분법은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적 관념이 되었다. 나아가 정신은 고상한 것, 육체는 천박한 것으로 간주하는 의식 및 무의식이 팽배해졌다. 이때 정신은 인간만의 것이었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듯 인간과 자연도 주체와 객체, 우등과 열등으로 분리되었다. 이로 인해 동물은 영혼 없는 기계로 취급되었고, 근대 과학 발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모두가 데카르트의 사상을 옳다고 판단하고 받아들인 덕분에 문명과 과학은 빠르게 발전했지만, 사회화되지 않은 자는 결코 학습할 수 없는 이것은 오직 인간만의 관점이자 지식이다.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아기나 동물은 없다. 즉 몸에 대한 혐오감 (ex.테레자가 겪는 월경에 대한 수치심) 또한 학습에 의한 결과이며, 이 거대한 관념에 대해 질문과 의심을 갖지 않는 이상, 그것은 인류 전체에 의해 당연시되고 옳은 것이 된다. 테레자가 카레닌 곁에서 편안함을 느끼듯이, 많은 사람들이 동물-자연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건 그들이 사회적 관념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1889년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마부의 채찍에 맞고 있는 말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 목을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는데, 이를 계기로 모두로부터 정신질환자로 낙인찍힌다. 말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동물은 영혼이 없는 기계라는 당시 사회적 관념에서 볼 때 '비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채찍으로 맞는 대상이 말이 아니라 사람이거나 어린 아이였으면, 그를 보호하는 니체의 행동은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이 책을 통해 사회적 관념(ex.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니체와 테레자를 옹호한다. 동물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민하는 마음, 즉, "인간의 참된 선의"를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공통으로 형성된 거대 관념조차 어찌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자발적 사랑"이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너무 심오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나아가 동물과 인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인류의 실패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인간은 데카르트의 관념을 채택함으로써, 동물을 사랑하는 길이 아닌 지배하는 길을 택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친구처럼 지내는 대신, 좁은 축사에 여러 마리의 동물들을 가두고 착취해왔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한 유일한 권리다.


인류 전체가 약자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빠르게 용인하기 위해 신의 이름까지 빌려와,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위치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관념을 알 리 없는 동물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희생당해야 했다. 더욱 무섭고 참혹한 사실은, 인간중심주의가 이미 만연한 세계에서 동물이 인간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신의 말로 인해, 자본주의에 의해, 과학에 의해, 수많은 인간의 논리에 의해 인간과 동물의 불평등한 관계는 정당화되었다. 니체처럼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간 정신병자가 되기 십상이다. 이처럼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게 인간을 지배하는 키치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닐까. 나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에서 탈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건 백인이기 때문에 백인우월주의에서 탈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변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기 때문에 동물을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누군가의 권리를 위해 울고 싸울 수도 있는 것이다.


니체가 말을 위해 울었다가 손가락질 받은지도 10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 적어도 니체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일만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동물에게 연민하는 마음, 인간의 참된 선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자.


밀란 쿤데라는 여기서 한 발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사랑을 비교한다. 토마시와 테레자 간의 사랑, 그리고 테레자와 어머니 간의 사랑에는 규율, 의무,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사랑을 준 만큼 받기를 강요하기도 하고, 부부라는 관계·모녀라는 관계 사이에는 반드시 사랑이 존재해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의무적으로 거기에 따르기도 한다. 이는 상대의 존재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카레닌과 테레자 간의 사랑은 이해관계에서 자유롭다.


… 도무지 떨쳐 버릴 수 없는 신성모독적인 생각이 테레자의 영혼 속에서 싹텄다.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부인을,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


개와 인간의 사랑을 분석한 이 부분이 나는 참 재밌고 새로웠는데, 인간은 과연 인간을 사랑할 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사랑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무가 아닌 100% 자신의 의지에 따라 지속하는 사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과 동물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튼 분명한 것은, 인간과의 사랑에서 얻지 못하는 배움이나 행복과 위로 등을 동물이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을 향한 사랑도 많이 경험해야 좋은 이유가 아닐까.


[요약] 카레닌의 행복과 사랑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관습이 빠져 있다. 반면, 인간은 욕망할 때든 사랑할 때든 사회적 관습에 의해 지배당하며 괴로워한다. 데카르트 이후 부상한 인간중심주의는 이러한 인간과 동물의 분리를 더욱 심화시켰는데,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심오한 행위를 매개체 삼아 동물을 향한 인간의 사랑에서 이러한 관습에 대항할 선의를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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