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
어느 나라든 구전되어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보면 상상 속의 동물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구미호나 해치, 도깨비 등이 있겠고 서양에는 드래곤이나 유니콘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갓파는 일본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요괴 중 하나로, 대체적인 외형 묘사를 보면 초록색 몸에 부리같은 입과 거북같은 등딱지가 달렸으며 손발에는 물갈퀴가 있고, 머리에는 접시를 얹고 있다고 전해진다. 접시에는 물이 고여있는데 이 물이 말라버리면 갓파는 죽게 된다고 한다.
지금에서야 갓파를 포함한 모든 신비로운 존재들이 옛 사람들의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많은 전설과 민화 속에 심심찮게 등장하고 그들과 인간이 얽힌 이야기가 목격담처럼 전해지는 것을 보면, '어쩌면 옛날에는 진짜로 그들과 우리가 함께 살았던 것이 아닐까?'하는 들뜬 상상도 하게 된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살아있을까?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라 케이이치(原恵一, 1959~) 감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19세기 에도시대에서 21세기 현대로 갓파를 소환하기에 이른다. 애니메이션 영화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2007)이 그 결과이며, 시간여행한 갓파가 한 소년을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채롭게 그려내고 있다.
시간의 변화는 어찌저찌 적응한다손 쳐도, 공간의 변화는 그 양상에 따라 생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은 인간과 갓파의 감정적 교류를 넘어,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공간에 생명을 향한 배려가 과연 얼마만큼 존재하는지 되돌아보게 하므로, 생태비평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은 본래 갓파의 시공간적 고향인 에도시대 '용신 늪'에서 시작한다.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자연공간 '용신 늪'은 갓파들 삶의 터전이자, 가뭄이면 비를 내려주는 용을 신령처럼 받드는 전설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늪을 개간해 논으로 만든다는 얘기가 들리자, 갓파 쿠의 아버지는 인간 사무라이에게 커다란 잉어까지 잡아다 바치며 제발 취소해 달라고 부탁한다. 사무라이는 고작 제 배를 불리고자 늪을 없애는 것이지만 갓파 입장에서는 살 곳을 빼앗겨 죽음에 내몰리는 것과 같으니, 약탈자를 향한 피해자의 태도치곤 공손해도 너무 공손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갓파가 '물의 정령'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요괴 따위'로 취급하며 단칼에 쿠의 아버지 팔을 잘라버리고 이내 목숨까지 거두어 버린다. 제 이익을 위해 공간을 약탈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뭇 자연 생명에 대한 존중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잔악무도한 태도다. 바로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땅이 요동치며 지진이 발생하고 쿠는 갈라진 땅 틈으로 추락하게 된다. 지진이 일어난 시점을 생각하면 인과관계상 사무라이 행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자 형벌처럼 보인다.
옛 전설이나 신령, 정령 이야기가 모두 자연의 신비로운 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데서 나왔다는 점을 상기하면, 사무라이가 아무리 부정하고 무시한들, 인간은 알지 못하는 자연의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알 수 없는 지진이 갓파 쿠를 인도한 곳은 2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현대의 공간이다. 우연히 쿠가 잠든 화석을 발견한 소년 코이치가 쿠를 집으로 데려오고, 쿠는 온통 인간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홀로 눈을 뜬다. 쿠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준 코이치네 가족들 덕분에 쿠는 건강을 회복하고 빠르게 현실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어딜 가도 인간밖에 없는 현실은 갓파를 위한 공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지나지 않았다.
사무라이는 이제 없다는 말에 쿠는 안심하지만, 눈에 보이는 약탈자가 사라진 것은 약탈할 공간조차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까닭이다. 용신 늪은 이미 개간당해 주택가로 뒤덮인 지 오래고, 반딧불은 차의 헤드라이트와 전봇대가 대신하며, 쿠가 물갈퀴를 펼칠 수 있는 곳은 빗물 고인 작은 웅덩이가 전부다. 그야말로 모든 공간을 인간이 남김없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통해 갓파가 사라진 원인은 인간의 자연 파괴 및 도시 개발에 있음이 확실해진다. 어찌 갓파뿐이랴. 늪에서 갓파와 더불어 살았을 반딧불, 잉어 등 모든 생명이 인간의 공간 지배와 함께 사라졌다.
결국 도시를 벗어나 '갓파 마을'을 찾은 코이치와 쿠는 맑은 물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한때를 누리기도 한다. 쿠처럼 살아남았을지도 모를 현대의 갓파를 찾아 떠난 둘만의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갓파는 그저 관광상품에 지나지 않았고, 혹시라도 진짜 갓파를 발견해 생포해 오면 천만 엔의 상금을 주겠다는 홍보 현수막만 나부낄 따름이다. 갓파를 어디서 볼 수 있냐는 코이치의 물음에 "그걸 알았으면 내가 진작에 잡아 천만 엔을 받았겠지"라는 한 아저씨의 답변은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돈으로 환산시키는 인간의 환원주의적 사고를 보여준다.
공간의 약탈자 및 지배자로서의 인간은 배타적인 종을 제 공간에서 모두 몰아내는 것에서 나아가, 같은 종인 인간을 향해서도 폭력을 일삼는다.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은 코이치네 가족과 갓파 쿠 외에, 집단따돌림을 당하는 여자아이 키쿠치를 등장시켜 인간의 잘못이 자연에서 사람으로 확장되는 것에 주목한다. 집단으로부터 소외된 개인은 (인간만의) 공간으로부터 배제당한 갓파(자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피해자가 된 이들은 집단 혹은 그들의 공간에 소속되지 못했기에 늘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다른 아이들이 코이치에게 갓파를 보여달라 조를 때, 키쿠치는 그녀 홀로 "잘 지켜줘."라고 부탁하며 유일하게 쿠의 입장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갓파의 존재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코이치네 가족과 쿠는 끈질긴 요청에 못 이겨 TV 방송에 출연하기에 이른다. 각종 언론이 갓파를 취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코이치네 집 주변으로 몰려들어 며칠밤을 새는 장면은 현실적 가능성이 있기에 더욱 눈살이 찌푸려진다. 갓파를 제 손으로 배제할 때는 언제고 현대에 새롭게 나타난 갓파가 돈이 될 것 같으니 의사를 묻는 배려 따위 없이 카메라를 들고 마구 찍어댄다. 갓파 쿠에게 있어서는 사무라이가 든 칼이나 현대인이 든 카메라나 공포스러운 위협에 불과하다. 200년 후의 시대에서도 인간에게선 생명을 향한 배려와 존중을 찾아볼 수 없다.
방송 출연을 계기로 갓파 쿠에게 닥쳐온 비극 및 인간과의 갈등은 극대화된다. 200년 전 사무라이에게 잘려나간 아버지의 팔을 방송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쿠는 그 팔을 붙잡고 서럽게 우는데, 사무라이의 후손으로 보이는 팔의 '소유자'는 가보이니 돌려달라 말한다. 슬픔과 분노로 이성을 잃은 쿠는 팔을 들고 방송국으로부터 도망치지만, 갓파를 목격한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서 쫓아온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쿠를 도운 코이치네 반려견 오쌍이 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 비극까지 발생한다.
인간으로부터 쫓기다 못해 결국 도쿄타워의 꼭대기까지 몰린 쿠는 급기야 죽음을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가고 싶다고 울부짖는 쿠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인간을 향한 원한과 혐오감이 극에 달한 이때, 쿠를 구원하는 것은 200년 전 지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신비성의 영역이다. 아버지와 죽음만을 생각하던 쿠의 마른 접시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하늘에 용신이 나타난 것이다.
이때 나타난 용은 인간의 모든 부당함을 심판한다는 뜻이자 인간이 결코 점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대부분인 옛 전설처럼, 전설적 존재인 용도 전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자연의 신비성도 언제나 인간에게 억압당하고 소외당한 약자의 편이다. 나아가 인간이 약탈하고 점유하고 지배한 그 모든 공간을 창조한 것은 결국 인간이 아닌 자연임을 우리는 쉽게 망각하고 만다. 즉, 인간은 제 손으로 공간을 파괴하고 다른 생명을 배제할 수 있어도 결코 공간과 생명을 새롭게 창조할 수 없다.
소외당한 약자로서 할 수 있는 저항의 방법 중 한 가지는 그 공간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용이 지나가고 난 뒤, 쿠에게도 드디어 탈출의 기회가 찾아온다. 수신인 불명의 편지가 쿠에게 도착한 것인데, 쿠는 이것이 인간이 아닌 요괴가 쓴 편지임을 바로 알아본다. 코이치네 가족과 깊은 정이 들었지만, 인간만의 공간에서 인간처럼 평생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 쿠는 편지를 보낸 요괴가 있는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의 시야를 피해 코이치와 마지막 모험을 마친 쿠는 그렇게 무사히 요괴와 만난다.
한편, 탈출을 선택한 것은 쿠뿐만이 아니다. 따돌림으로 괴로워했던 키쿠치 역시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쿠를 만난 것을 계기로 키쿠치와도 가까워졌던 코이치는 떠나기 전 그녀를 찾아가 홀로 힘겨웠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해준다. 이처럼 탈출을 앞둔 그들의 앞길을 희망으로 비추는 것은 연대가 자리하는 가족애와 우정이다. 위험으로 가득한 공간 속에서 그들에게 손을 뻗어준 이들과의 연대는 그 자체로 든든한 안전지대가 되었다.
비록 쿠가 바라던 대로 현대에 또 다른 갓파가 살아있을지 여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지만, 쿠는 포기하지 않고 갓파를 찾는 여정을 계속해나갈 것임을 다짐하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쿠처럼 안전지대를 발견해 그 속에서 숨어지내는 갓파가 어딘가 있기를 바람과 동시에, 인간이 점유한 공간이 인간 외 존재와 인간 내 약자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하라 케이이치 감독은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을 통해 결국 우리에게 이런 답을 내민다. 이런 비극이 또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갓파를 소환하기 전에 갓파가 돌아올 자리를 우리의 공간 속에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