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실뱅 테송 ≪눈표범≫
인간의 눈을 피해 깊은 야생에서 삶을 일구는 은둔자들을 상상하노라면 언제나 가슴이 세차게 뛴다. 알래스카의 설원을 달리는 늑대 무리, 티베트 숲속에서 먹이를 사냥하는 표범, 시베리아 산속에서 새끼를 돌보는 호랑이, 맹수를 피해 달음박질하는 영양, 가젤, 물소 등……. 인간이 살기 힘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 "야생 동물"은, 인간의 보호라는 명목 아래 철창에 갇힌 채 따가운 시선을 온종일 받아야만 하는 전시 동물들과는 달리, 제 발로 마음껏 달리는 자유를 누리며 산다. 모든 동물이 원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가두어진 철창 따위 없으면서도 이따금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결박된 듯한 부자유스러움을 느끼는 나로서는 태곳적 야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그들을 동경할 수밖에 없다. 본능을 억누르고 규율에 순종하는 법 없이 오로지 자연의 순리만을 따르는 그들. 자연에서 생존할 수 있는 단단하고 강인한 육체와 그에 맞추어 잘 발달된 감각과 우월한 신체 능력-인간에게 없는 그것-은 과연 축복이 아닐는지.
지구 대부분의 지면은 인간 종족을 위해 열려 있지 않았다. 인간은 적응력이 아주 미약하고, 아무 데도 특수화되지 않은 종족이다. (중략) 동물은 운명이 가둬버린 환경에 스스로를 제한시켰다. 필요에 의해서였다. 동물들의 유전자 코드는 생물학적 환경이 아무리 적대적일지라도 그 환경을 따라가는 성향을 지니게 해주었고, 이런 적응성이 야크를 주권을 지닌 당당한 군주가 되게 해주었다.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욕망이 없었기에 갖게 된 주권이다.
이러한 축복과 주권 탓에 그들이 사는 적대적인 환경으로 직접 찾아가지 않는 이상 인간 종족은 야생 동물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 또 가까이 간다 해도 인간 종족보다 훨씬 민첩한 그들이 쉬이 모습을 드러내 줄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때껏 인간이 야생에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그들은 우릴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며 반길 리가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표범을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도박과도 같은 이 모험에 나선 이가 있다.
≪눈표범(원제: La Panthere des neiges)≫의 저자 실뱅 테송(Sylvain Tesson)이다. 그는 동물 전문 사진작가 뮈니에 등과 함께 해발 5,000미터에 영하 20도 추위를 자랑하는 티베트 고원으로 떠난다. 눈표범을 좇아 극한 여행길에 오른 그들은 한 자리에 가만히 잠복한 채로 기약없는 기다림을 인내하는 법을 필수적으로 배워야 했다. 기다림, 고독, 침묵, 인내… 모두 현대인과 거리가 먼 것들이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참아내야 한다니 한시가 바쁜 사회에서 그건 어리석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감. 극한 추위와 희박한 공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을 묵묵히 인내하는 과정에서 철학적 사유가 찾아왔고 실뱅은 시적인 문장으로 그것을 옮겨내는 데 성공했다. 독자로서 인내의 시간을 따라가면서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뮈니에는 여덟 시간 동안이나 계속 한자리를 지키며 잠복하는 게 가능한 사람이다. 그리고 꼼짝 않고 보내는 그 긴 시간은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 모든 세계는 죽어가고, 육식동물에 의해 찢기는 초식동물의 몸은 고원을 피로 얼룩지게 만든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자외선에 불탄 뼈들이 생물학적 왈츠에 끼어든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운 직관이 탄생했으니, 곧 광자 에너지를 내놓는 태양의 지휘 아래 모든 세상의 에너지가 풀에서 살로, 살에서 흙으로 가는 폐쇄 사이클 안에서 순환한다는 것이다.
헤라이클레이토스는 단편집에서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대체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연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숨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힘이란 굳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이기에 숨는다는 뜻일까?
이 세상에 인간이 출현한 건, 우주의 나이에 비했을 때, 마치 어제나 다름없는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대뇌피질은 인간에게 전대미문의 재량권을 주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최상급으로 소지할 수 있게 해주는 재량권. 인간은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통탄하면서 그 일을 행한다. 아픔에 명철함이 더해진다는 건, 그야말로 완벽한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도'는 고원에서 방랑하는 고독한 자의 삶을 위한 교리로 남았다. 고독한 늑대의 신앙.
잠복이라는 행위는 숨돌릴 겨를조차 갖지 말라고 명령한다. 예민함을 필요로 하는 그 훈련이 알려준 비밀은 수신하는 주파수의 조절 능력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난 티베트에서 보낸 이 몇 주일만큼 강렬한 감각의 떨림을 느끼며 살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계속해서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어두운 영역도 샅샅이 살펴 볼 참이다. 하루 일정표에 표범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잠복은 이제 행동방침이다.
위처럼 실뱅의 사유는 고대 동서양 철학에서부터 현대 인간 문명의 성찰까지 시공간을 활개하며 널을 뛴다. 그의 무한한 사유를 튼튼히 뒷받침하는 시적인 문장은 눈표범만큼이나 아름답고 우아하게 느껴지며, 실뱅은 결국 '잠복'을 제 일상의 행동방침으로 삼기에 이른다. 사실 ≪눈표범≫ 뿐만 아니라, 명상록 같은 형태의 야생동물 관찰기는 대부분 이러한 인내의 미덕과 잠복의 행동방침 속에서 깨달음을 얻곤 하는데, 야생 동물이 가진 예술적 아름다움(美)에 대한 찬양은 그 속에서도 결코 빠지는 법이 없다. (*하기야 야생 동물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지 않은 사람이 어찌 잠복을 견디고 관찰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만은.)
표범이 이교도의 사고처럼 다이달로스의 미궁을 돌아다닌다. 식별하기 쉽지 않도록, 녀석은 세상의 파장에 맞추어 고동친다. 그 아름다움이 추위 속에서 진동한다. 죽은 것들 가운데서 생명력으로 팽팽하고, 평화로우면서도 위험하고, 여성형 명사로 지칭되면서도 지극히 남성적이며, 수준 높은 시詩처럼 모호하고, 예측 불가에다 안일함을 모르고, 얼룩덜룩하고, 일렁이는 무늬를 지닌 짐승. 그것이 다양한, 불규칙한, 변화무쌍한 표범이다.
마침내 마주한 표범의 아름다움에서 전율을 느끼고 있는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문장이다. 우리보다 강한 맹수의 존재에게서 공포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인간의 예술적 감각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야생성을 문명에 배치되는 야만으로 치부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영감을 얻어 예술로 승화시키고 만 인간의 아이러니. 시, 문학, 노래, 그림, 사진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동물이 살아 숨쉴 수 있는 곳은 야생 자연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물을 죽이고(밀렵, 사냥) 자연으로부터 강제로 유리시키는(상품화) 인간의 행위가 예술로 포장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표범 모피 코트를 걸친 사람들의 숫자가 전 세계에 남아 있는 표범의 수보다 훨씬 많다"는데. 동물의 살가죽을 도륙내어 휘감은 채 '아름다운' 패션인 양 뽐내거나, 필요치 않은 살생을 저지르는 사냥을 '즐거운' 유희인 양 즐기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전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영양들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리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 털이다. 캐시미어보다 더 부드러운, 흰색과 옅은 회갈색의 아름다운 털을 탐낸 사냥꾼들은 세계적인 방직물 기업가에게 영양 가죽을 팔아넘겼다. (중략) 영양들의 목덜미 주위를 둘러싼 빛을 보고 있자니, 지구에서 인간이 지나간 흔적 중 하나는 싹쓸이해서 없애는 능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정의하는 철학적인 문제 하나를 해결했다. 인간은…… 청소기다.
얼마나 부끄럽고 우스운 일인가. 한 문장으로도 정의내리기 어려워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 표범에 비해, '청소기' 단 한 단어로 정의되는 인간이라니. 지구 입장에서 보면 이 정의가 꼭 틀린 말이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 그러니 받아들이고 반성할 수밖에. 야생 동물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들 스스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자유로이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박제되거나 전시되어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동물이 어찌 동물(動物)이라 불리울 수 있겠는가. 야생 동물의 멸종은 인간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아름다움을 영구 소멸시키는 일이다.
나는 앞으로도 야생 동물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미덕과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는 예술,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인내 속에서 성장하는 철학을 향유할 권리를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