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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적 상상력이 그린 동물의 모습

[영상] <아빠가 필요해>, <내 친구 고라니>

by 생태비평가

나는 한때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길 꿈꾼 적이 있다. 내가 상상한 대로 마음껏 그려내는 작업이 재밌고 즐거워서다. 그러나 풍부했던 상상력은 나이가 들수록 시들어만 갔다. 그리고 싶어도 더 이상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붓을 놓았고 창작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을 보는 건 좋아한다. 실사영화보다 상상에 대한 제약이 덜한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 일본의 지브리 영화나 미국의 디즈니 영화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라져가는 내 상상력과 동심을 지켜줄 작품이라면 가리지 않고 봐왔다. 그중 발군의 상상력으로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길이가 10분도 채 되지 않는 국산 애니메이션이다.




장형윤 감독(1975년~)이 제작한 <아빠가 필요해(2005)>라는 작품은 총 길이가 9분 18초에 지나지 않는다. 짧디 짧은 단편영화인 것인데 어째선지 내게 남기는 여운은 장편영화 못지 않다. 보고 나면 항상 마음이 따뜻해지고 포근한 기분이 든다. 간략한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직업이 소설가인 늑대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 여자가 자신의 딸을 맡기면서부터 진정한 가족이 생기게 된다는 내용이다.


늑 대 曰 나는 올해야말로 위대한 소설을 써서 늑대는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고쳐주자고 마음 먹었다.


늑대가 소설을 쓰는 것도 특별한데, 이 늑대는 마치 사람처럼 빨래도 하고 담배도 핀다. 생김새로 보나 사냥하는 것으로 보나 늑대는 늑대인데, 하여간 인간 말도 할 줄 아는 특이한 늑대다. <아빠가 필요해> 속 늑대가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더 특별해지는 이유는 이솝우화나 라이온킹처럼 의인화된 동물들만 등장하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사회 그대로를 작품의 배경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같은 늑대와 진짜 사람이 다 있는 세계.


급기야 한 인간 여자는 늑대가 사는 집의 벨을 누르고 6살 영희를 딸이라며 두고 가버린다. 소위 말하는 "편견 없는" 상상력. 늑대도 인간의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물론 늑대는 자신은 아빠가 아니라며 황당한 반응을 보였지만 혼자 된 영희를 결국 살뜰히 돌보기 시작한다. 서툴지만 영희의 끼니를 챙겨주려 하고 영희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사슴도 잡아먹지 않고 살려둔다. 영희의 놀이상대가 되어주고 밤에는 무섭지 않도록 노래도 불러준다. 갑자기 시작된 육아로 인해 위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꿈마저 틀어지지만 "지금까지 인생에서 누군가 나를 이토록 필요로 해준 적이 있었던가?" 하는 물음 앞에 그는 주저없이 영희를 지키고 돌보는 삶을 택한다.


제목 없음.png <아빠가 필요해> 中, 늑대와 영희 @Youtube "지금 애니"


시나리오 내용만큼이나 따뜻하고 정겨운 작화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무화(無化)시키는 작품의 미(美)를 더한다. 동물과 인간이 왜 다르지 않은지 윤리나 철학을 들어 가타부타 설명할 필요 없이무작정 그러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 짧지만 아주 강력하다고 느꼈다. 서사뿐 아니라 디테일에 있어서도 마음껏 발휘되는 감독의 상상력은 세심하고 친절해서 한 번 본 작품 세계도 오래 기억나게 하고 다시 찾고 싶게 만든다. 내면을 두드리고 그 속에 존재를 아로새기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상상과 예술이 가진 힘이 아닐까?


때로는 터무니없는 상상력이 우리 현실에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고 넘어서는 힘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감독이 2009년 제작한 단편영화 <내 친구 고라니>는 현실 그 너머의 세계를 통해 야생동물 보호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으로 제5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반달곰과 돼지가 올무에 걸린 고라니를 구하기 위해 사람으로 분장하고 올무를 자르기 위한 '뺀찌'와 고라니를 치료하기 위한 '구급약'을 구하러 가는 내용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수많은 동물들의 생사를 움켜쥐고 제 마음대로 종용하는 인간들의 이기심을 비판하도록 만든다.


반달곰 曰 안녕하세요? 뺀찌 좀 빌려주세요.
돼 지 曰 구급약도요.


올무, 뺀찌, 구급약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작금의 현실에서 동물의 생명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장형윤 감독은 동화적 상상력을 다시 한 번 동원해 그러한 현실을 비틀어낸다. 마법 같은 상상이 만들어 낸 현실의 균열 속에서 반달곰과 돼지는 고라니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제목 없음.png <내 친구 고라니> 中, 인간에게 도구를 빌리는 반달곰과 돼지의 모습 @Youtube "지금 애니"


<아빠가 필요해>와 <내 친구 고라니>는 모두 동물이 한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야 한다고 믿는 역할을 인간보다 잘 수행해내는 동물들의 모습이, 또 그러한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감독의 상상력이 결국 차가운 현실과 우리의 마음을 녹여내는 것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예술이 가진 강력한 힘에 감탄하게 되었다. 스케일 큰 거대판타지가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을 비트는 동화적 상상력은 그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 있다. 장형윤 감독이 가진 고유의 감성이 귀하디 귀한 이유다.


[요약] 장형윤 감독의 단편영화 <아빠가 필요해(2005)>와 <내 친구 고라니(2009)>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내재한 또 다른 가능성을 특유의 따스한 감성과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동심을 가진 아이와 차가운 현실을 등에 진 어른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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