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프랑켄슈타인≫
그 이름도 유명한 '프랑켄슈타인'. 그러나 과연 원작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를테면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창조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는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은 공포소설인 동시에 최초의 공상과학소설로 평가받는다는 사실까지.
최초의 SF, 그렇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은 불가해한 미지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과학기술로 발명해 낸 피조물(인조인간)이라는 점에서 SF 영역에 속한다. 본 소설이 집필된 1818년도에는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다 준 '과학'을 신뢰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구안, 즉, 과학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를 경계하는 태도를 보여준 바 있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프랑켄슈타인>의 부제목만 봐도 그렇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려다 판도라의 상자로 인한 재앙을 불러오고 결국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고 만 프로메테우스처럼, 프랑켄슈타인 역시 과학으로 인간을 창조하려다 괴물을 낳고 평생을 불행에 시달리게 된다. 불행의 원인은 괴물이 처음부터 악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의 결과가 그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 모든 비극은 과학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며 이를 통제하지도 포용하지도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의해 극대화된다.
생을 부여받은 그날을 증오하노라! 저주받을 창조주 같으니라고! 어찌하여 자신조차 역겨워 고개 돌릴 흉측한 괴물을 빚었단 말인가? 신은 자신을 본뜨는 아량을 베푸시어 인간을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만들었건만, 나는 흉측하기 그지없고, 인간과 닮아 더 섬뜩하구나. 사탄조차 그를 존경하고 격려하며 동료가 되어 주는 다른 악마들이 있건만, 나는 온갖 미움을 받으면서도 오롯이 혼자로세.
제 손으로 만든 인조인간이 눈을 뜬 순간 프랑켄슈타인이 최초로 느낀 감정은 공포와 후회였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달리 피조물의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흉측했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켄슈타인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도망쳐버리고, 홀로 남은 피조물은 어둠 속에 숨은 채 어느 한 가족을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배운다. 인간에 대해 알수록 그들을 좋아하게 된 피조물은 그들과 어울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번번이 좌절당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이 창조주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된 것이다.
나무를 대신 베어주고 허드렛일을 아무리 도와주어도, 심지어 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해주어도, 그의 모습을 본 인간들은 한결같이 괴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피하고 돌팔매질을 하며 공격한다.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아도, 외모가 인간과 다르기에 그는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아,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오직 허기와 갈증, 더위만 느끼며 처음 품을 내주었던 그 숲에 영원히 남아 있었더라면!
숲은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품어주었으나 인간은 달랐다. 이로 인해 피조물이 느낀 깊은 고독감, 인간을 향한 증오와 배신감, 고통, 슬픔 등이 원작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 부분을 읽으며 피조물을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피조물은 라퐁텐의 <당나귀와 개> 우화에 빗대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우화 속에서 당나귀는 개가 주인에게 애교 부리는 것을 보고 따라하다가 매질을 당한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인간은 개는 예뻐하면서 당나귀는 미워한다. 이러한 부조리함은 차별당하는 존재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새겨진다. 그가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면은 인간과 똑같은데,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에게 혐오받는 처지라니. 결국 피조물을 괴물로 만든 것은 인간들이었다.
저는 이 음산한 하늘도 좋습니다. 저 하늘이 당신네 인간들보다 제게 친절하니까요. 아마 사람들이 제 존재를 알게 된다면 다들 당신처럼 행동하겠죠. 그리고 절 죽이려고 무기를 손에 들겠지요. 그런데도 저는 절 증오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까?
창조주를 원망하던 그는 결국 아무도 모르게 프랑켄슈타인의 막내 동생을 죽이고 그와 가족처럼 지내던 하녀 쥐스틴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운다. 피조물에 대해 거의 잊고 살던 프랑켄슈타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피조물을 향한 공포와 증오에 휩싸이며 평생을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창조해놓고 그 결과를 감당하지 못해 평생을 피조물의 속박으로부터 놓여나지 못하는 창조주의 입장 또한, 헤아릴수록 비극인 건 마찬가지다. 창조주나 피조물이나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상황만 계속 일어나는 비극 가운데,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한 번 더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을 증오하지 않고 받아들여줄 짝이 생긴다면 더 이상 인간 곁에 맴돌지 않고 아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으로 가 둘이서만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하며 말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인간들을 떠나 짐승만 사는 벌판에서 살아가겠다는 것이로군. 하지만 네놈은 인간의 사랑과 공감을 간절히 바라지 않았더냐. 그런 네놈이 영원히 인간을 등지고 살겠다고? 네놈은 결국 다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으로 돌아와 인간의 친절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널 혐오하는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되겠지. 그럼 그 사악한 욕망이 되살아날 것이고, 이번엔 함께 하는 동료까지 있으니 더 손쉽게 인간을 해칠 것이다. 그리 둘 수는 없다. 나는 네 요구를 들어줄 수 없으니 설득하려 드는 건 그만해.
프랑켄슈타인은 위와 같이 피조물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나, 결국 피조물이 그간 인간과 엮이며 겪었던 고통에 대해 듣고 "창조자라면 피조물이 그르다고 불평하기 이전에 먼저 피조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도리"라는 창조자로서의 의무를 되새기며 스코틀랜드로 가 피조물의 짝을 만들기로 한다.
이때 프랑켄슈타인이 친구 클레르발과 함께 고향인 제네바로부터 스코틀랜드로 떠나는 과정이 당시 유럽의 풍경 묘사와 함께 장시간 펼쳐지는데, 자연은 항상 상념에 젖은 프랑켄슈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자연의 경이롭고 장엄한 모습을 마주함으로써 마음을 정갈히 하고, 지나간 일에 관한 고민을 잊었소.
그는 열정 가득한 사람이었기에 인간과의 교감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소. 그래서 다른 이들은 감탄하고 말았을 자연의 풍경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연모했소.
힘들 때 자연을 찾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었나 보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을 두고 느끼는 괴로움은 계속된다. 피조물이 그토록 원했던 짝의 탄생을 눈앞에 둔 순간,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손으로 짝을 없애버린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의도에 관계 없이 예상치 못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과학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지켜본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을 향한 원망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과 우정을 향한 갈망은 간절히도 불타오르는데, 이 세상에서 자신은 경멸과 공포의 대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면 누구라도 괴물처럼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까. 피조물은 결국 프랑켄슈타인의 절친한 친구 클레르발도 죽이고,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는 여인 엘리자베스마저 죽인다. 진짜 괴물이 되고만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을 향한 복수심과 죄책감에 점철당한 채, 피조물을 좇기로 한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 끝, 북극까지 다다라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쇠약해진 프랑켄슈타인이 먼저 죽고, 피조물은 자살을 결심한다.
당신 배를 빠져나가면 저는 저를 먼 곳으로 데려가 줄 얼음 조각을 타고 지구의 최북단까지 갈 생각입니다. 거기서 장작을 모으며 저의 장례식을 준비한 다음, 이 비참한 몸뚱이를 한 줌 재가 되도록 불사를 겁니다. 그래야 호기심 많고 부정한 자가 제 시신을 보고 영감을 받아 저 같은 존재를 또다시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을 증오한 것보다도 더, 피조물은 저 자신을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인 월턴에게 작별인사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월턴, 이만 작별을 고하오! 부디 평온 속에서 행복을 구하고 야망을 멀리하길 바라오. 과학에서 업적을 쌓거나 대단한 발견을 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겠다는 야심이 순수한 꿈으로 느껴진대도 말이오.
인간의 야망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가져다주었고 이는 문명의 이기를 앞세운 인간중심주의를 부추겼다. 그러나 자연이 가진 전능함에 비하면 인간은 여전히 한없이 무지하고 어리석다.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예측불가능한 위험은 항상 존재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범위에서 일어나므로 인간의 힘을 맹신해서는 안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향한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이 과학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기후변화를 위시한 각종 문제를 과학의 발전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러한 맹신은 언젠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우를 범하고 말 것이다. 성장만능주의에서 벗어나 과학의 발전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항상 감시하고 경계해야만 하는 이유다.
아! 인간은 왜 짐승보다 감정적인 것을 자랑으로 생각할까? 수많은 감정은 더 많은 것을 감당하게만 하잖소. 만약 우리에게 배고픔, 갈증, 성욕과 같은 원초적인 욕구밖에 없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워질 거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기에, 이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나부끼고, 누군가가 건넨 우연한 말 한 마디나 우연히 맞닥뜨린 풍경에도 울컥하게 되지.
인간은 강하지만 약하다. 과학은 위대하지만 위험하다. 이러한 양면성을 고루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갖추고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