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정신을 깨우는 바람과 모래와 별

책 ≪인간의 대지≫

by 생태비평가

생텍쥐페리(1900~1944)는 비행기 조종사이자 작가로서, 일생을 비행과 글쓰기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실제적 경험담을 산문시로 녹여낸 <인간의 대지>를 읽고 느낀 감상은 한 마디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왜냐하면 그는 목숨을 걸고 인간의 정신을 탐구했고 그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진정한 의미의 생명을 감각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와 진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그저 먹고 자는 것으로 생을 이어나가는 사람이 수천수만에 달한다. 어쩌면 이것은 정신적 죽음의 상태다. 메마른 마음으로 아무것에 관해서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생에 순응하는 것은. 그야 생각하면 골치 아프고 괴로울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잠든 정신으로 일하고 먹고 노는 게 훨씬 편안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잠들어 있던 정신이 가끔 깨어나서 이런 질문을 던지며 현실에 안주한 인간의 삶을 방해한다. 유년의 꿈, 내 안의 욕구, 야성의 부름, 보편적 진리를 향한 열망…뭐 이런 것들이 불쑥불쑥 뛰어오르며 현실의 벽 너머를 상상케 한다. 그 벽 너머에 있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발견이며, 그 순간 생명은 비로소 거센 심장박동으로 살아있음의 기쁨을 선물해준다.


대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 세상의 모든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대지가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물과 겨룰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


생텍쥐페리에게 비행기는 대지라는 목적을 향한 수단이었다. 자신을 발견하게 만들어주는 대지, 생텍쥐페리는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걸었다. 그가 비행하지 않고 보수적인 백작 가문에 안주하는 길을 택했다면 <어린 왕자>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람과 모래와 별을 누비며 명상하던 시간 속에서 생텍쥐페리의 정신은 비로소 깨어나 숨쉴 수 있었다.


우리는 오직 물질적인 부를 위해 일함으로써 스스로 감옥을 짓는다. 우리는 타버린 재나 다름없는 돈으로 우리 자신을 고독하게 가둔다. 삶의 가치가 깃든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살 수 없는 그 돈으로.

비행하던 그 밤, 그 밤 속에 빛나던 십만 개의 별들, 그 고요함, 몇 시간 동안 이어지던 그 절대적인 힘. 이런 것들을 돈으로는 살 수 없다.


돈의 무가치함을 알고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갈수록 흔치 않다. 정신적 해방은커녕 돈을 위해 일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의 가치를 잃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돈은 저항과 거리가 멀다. 비좁은 돈의 세계에서는 오직 소유와 지배, 그리고 순응뿐이다. 여기에 갇혀 오직 돈에게 시간을 바치다보면 정신은 빛을 잃고 죽고 만다. 생텍쥐페리는 이를 피하기 위해 하늘을 날았고 글을 써서 정신에게 제 시간을 바치고자 했다. 실로 아깝지 않을 시간이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돌멩이 하나를 놓으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인간이 되지 못한 것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즘이다. 그런 부끄러운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 생텍쥐페리는 비행기로 우편물을 전하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고, 생사의 위기에 놓인 순간에도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으로 끝내 생존을 포기하지 않은 기요메와 같은 동료들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돌멩이 하나를 놓더라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고 책임지는 것, 어렵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


제국을 건설하는 식민지군에게 삶의 의미는 정복하는 데 있지. 군인은 소작농을 무시해. 그런데 정복의 목적은 그 소작농이 정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진보의 열광 속에서 우리는 많은 이들을 철도 부설, 공장 건설, 석유 시추 작업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네. 우리는 이러한 건조물을 세우는 이유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망각해 버렸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정신이 깨어있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목적을 망각하지 않는다. 정신이 잠든 채 죽은 듯 사는 사람들만이 스스로와 스스로가 하는 일의 가치를 잊고 다른 이의 가치까지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사회체제가 그렇게 살게끔 우리를 추동하는 것처럼 느낀다. 조직 혹은 사회의 일부가 되는 순간 정신이 거대한 무언가에 억압당하는 듯, 그런 의문엔 관심조차 기울이지 말라는 듯, 그저 눈앞의 돈, 이익에 매몰되게 만든다. 본질적인 목적은 결국 망각되고 만다.


파라과이에 있을 때 나는 중심 도로에 깔린 포석의 틈바구니에서 코끝을 내밀고 있는 얄궂은 풀잎을 좋아했다. 그 풀잎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는 원시림에서, 인간들이 여전히 도시를 차지하고 있는지, 포석들을 약간 뒤집어 놓을 때가 되지는 않았는지 보려고 온 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풍요만을 드러내는 그런 형태의 황폐함을 좋아했다.


그러나 희망은 포석의 틈바구니를 뚫고 피어난 연약한 풀잎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마음을 죽게 두지 않으면 생텍쥐페리처럼 황폐함 속에서도 풍요를 찾을 수 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마음이 어떤 것에 이끌리고 감응하는 찰나를 놓치지 말자. 나를 포기하지 말고 찾아내자. 살아있음의 감각을 정신을 통해 온전하게 느껴야만 한다.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값진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온 마음을 다해 사막에 가닿는 일이 내게 허락되었다. 1935년 인도차이나로 향하는 비행 도중에 나는 이집트의 리비아 접경지대에 떨어졌다. 나는 풀로 붙여 놓은 듯 모래사막에 붙들렸다. 나는 그렇게 죽는 줄로만 알았다.


생텍쥐페리가 사막 한복판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순간은 그에게 있어 바로 그런 값진 경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인간의 대지>는 그 경험 위에서 탄생된 작품이다. 제3자인 내 입장에서 그의 경험담은 고생으로 얼룩진 시간으로 괴롭게만 느껴지는데, 직접 물 한 방울 없이 19시간 넘게 뜨거운 모래 위를 걷고 신기루를 수차례 겪으며 절망해 본 장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하라사막이 정말 좋다"고.


나는 이제 더는 이해할 수가 없다. 교외 열차를 탄 저 무리를. 스스로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느낄 수 없는 어떤 압력을 받아 마치 개미처럼 오로지 쓸모에 의해서만 환원된 저 사람들을.

나는 내 직업 안에서 행복하다. 나 자신이 하늘을 경작하는 농부인 것 같다. 교외 열차 안에서 나는 고통스럽다. 여기에서와는 아주 딴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곳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을 걸었고, 모든 것을 잃었다. 이것이 내 직업의 생리다. 어쨌든 나는 바닷바람을 원없이 들이마셨다.

한 번 그 맛을 본 자라면 결코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가, 나의 동료들이여? 위험하게 산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 말은 뽐내고 싶을 때나 쓰는 말이다. 투우사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위험이 아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생텍쥐페리는 정신적 죽음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육체적 죽음에 직면하는 길을 택했다. '교외 열차를 탄 무리'는 돈이라는 감옥과 안전한 도시에 갇혀 살아있음을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정신을 깨워주는 위험한 사막을 사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위기가 도사리는 사막 속에 생텍쥐페리의 삶, 생명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을 거는 삶이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이 비행과 모험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고, 좋아하는 일에 뛰어들어 소명과도 같은 의미를 발견했기에 죽음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나는 절대적 소명에 따랐던 것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을 언급했다. 다른 이들이 수도원을 선택하듯 사막이나 항공로를 선택했던 이들을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들을 찬양하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는 내 의도에 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감탄해야 할 것은 바로 그들에게 터전을 마련해 준 대지이기 때문이다.


대지는 소명 의식을 해방하는 터전을 마련해주었고 이는 인간을 자유롭게 했다. 어쩌면 인간의 정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대지로부터의 추방일지도 모른다. 사막 위의 어린 왕자는 반짝이지만 도시 속의 어린 왕자는 그 빛을 잃기 쉽다. 왜? 도시는 개인만이 존재하는 고립된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에서보다 사람이라곤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사막에서 타자를 사랑하기가 더 쉽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역설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다른 이를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한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인간의 대지>는 말한다. 생명으로 태어난 데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매순간 깨어난 정신으로 살아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