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무의 언어≫
아주 오랜 옛날 아일랜드(Ireland)에는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킬라니(Killarney)라는 숲이 있었다. 깊고 깊은 이 숲속에서 여왕으로 군림하던 주목 나무(Yew tree, 학명:Taxus Baccanta)가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귀도 미나 디 소스피로의 책 <나무의 언어>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다루고 있어 나무가 자서전을 쓴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보다 훨씬 기나긴 생을 살아가는 나무다보니 작품은 "마라톤처럼 길게 늘인 것이 아니라 간결하면서도 광시적인 자서전적 환경 우화"가 됐다.
그러나 긴 시간에 걸쳐 발생한 사건을 짧게 간추린 것이라 해도, 인간과는 다른 나무의 시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새롭게 다가온다. 게다가 우리의 주목은 그냥 나무도 아니고 숲의 여왕이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해낸 것처럼, 바로 당신도 주변의 모든 것에 따뜻하고도 주의 깊은 눈길을 주며 살아가기를 나는 소망한다. 후각과 시각, 당신의 모든 긍정적인 감각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 모든 것들에게! (중략) 세상은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돌아가고, 나는 빗물을 마시고, 햇살을 받으며 땅에서 자라났다. 시작은 그렇게 복되고 아름다웠다.
모든 생명의 탄생은 이처럼 복되고 아름답다. 삶을 향한 희망을 간직하는 것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럼에도 살다보면 희망의 불씨가 꺼진 듯 절망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땐 주변의 모든 것에 따뜻하고도 주의 깊은 눈길을 주기 위해 노력해볼 일이다. 우리가 모든 존재와 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 삶의 희망은 언제나 다시 차오르는 법이니까 말이다.
한편 주목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커서 어머니와 같은 여왕이 될 것이란 자각을 하고 있다. 주목이라는 수종이 숲의 여느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지적 자부심은 언뜻 인간중심주의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과연, 관점의 차이일 뿐, 이 세상의 모든 종은 각자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확실히 나무는 인간보다 오래 사니 그만큼 아는 것도 더 많을 수 있겠지.
떡갈나무와 몇백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는 대목에서는 식물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숲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떡갈나무가 숲을 다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쐐기벌레를 불러 모으고, 사슴이 새싹을 뜯어먹도록 풀어놓는가 하면, 딱따구리에게 딱새 숲을 임대해서 떡갈나무에 구멍을 숭숭 뚫는 작전을 써먹기도 한다.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주목이 스스로 만들어 낸 성장억제제였는데, 실제로 주목은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성분을 가지고 있어 주목나무 추출물이 항암제 개발에 쓰인다고 한다.
주목이 떡갈나무를 숲에서 몰아냈듯 전쟁과 싸움에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을 위해서도 땅속에 있는 버섯균 연결망을 이용하는 등 원거리 의사소통법 연구에 골몰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식물에게 스며드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고, "결국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의 식물과 상호 연결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주목은 자신이 나고자란 숲에서의 일들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경우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로서,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그런 종류의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고 또 내가 직접 그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마 당신은 내가 누굴 가리키는지 짐작할 것이다. 바로 '초록인간'이다. 그가 내 열매를 따 먹고 내 잎을 우려서 만든 차를 마셨던 그날, 한 인간이었던 그는 독을 마셨으면서도 죽지 않고 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능력까지 생겼다. 그것은 바로 그가 나의 형태의 영역으로 스며들어왔던 것인 바,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로 남아 있다.
나무와의 소통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가? 인간과는 형태부터가 전혀 다른 나무와 소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나무와 인간은 통할 수 없다는 편견을 없애고 활짝 열린 마음을 갖는 것부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초록인간'은 그것을 해냈고, 주목에 스며들어 그와 소통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그는 평범한 인간보다도 못한 낙오자로서 숲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숲에서 산 지 1년 2년이 지나고, 주목이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주목의 위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은둔하는 철학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초록인간'은 나로 하여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연상케 했다. 사실 성서에는 동물과 인간이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만이 새들에게도 복음을 설교하며 모든 생명과 동등하게 진리를 나누고자 했다.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당시 한 미술관에서 그의 일화를 처음으로 접하고 느꼈던 감동이 여전히 생생하다. <나무의 언어>에서 '초록인간'을 보자마자 바로 그를 떠올릴 정도니 말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면 '초록인간'처럼 주목과 소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무의 언어>는 '초록인간'뿐 아니라 몇 명의 인물에 대한 관찰기록을 포함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는 '로빈후드'가 있다. 재밌는 건, 원래 변변찮은 좀도둑에 그쳤던 로빈후드를 보고 안타깝게 여긴 주목이 제 가지를 내어주며 활을 만들게 한 다음부터 명성 높은 의적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나무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인간의 동화는 이렇게도 각색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영광을 누렸던 숲의 여왕 역시 결국 인간이 휘두르는 도끼의 칼날에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좋은 전망을 지닌 대수도원을 짓겠다는 명목으로 호수와 산을 가리고 서있는 커다란 주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여주인공 주목의 이야기는 분명 여기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숲에서 위대한 여왕의 통치와 지도를 다시 한 번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나무는 거의 없었다.
인간이 우리를 지배했고, 그들은 사악했다…….
그때, 기적은 바로 여기서 일어난다. 주목의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그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간신히 남아있던 뿌리를 통해 양분을 흡수하고 새로운 새싹과 줄기를 피워낸 주목은 그 자체로 신성한 현장이 되었고, 대수도원을 짓던 사람들도 더 이상 부활한 주목을 건드리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그뿐, 인간의 권세는 이미 세상의 구석진 이곳, 주목의 숲에까지 뻗쳤고 평온했던 그곳은 파괴를 향한 인간의 갈망 아래 무너지고 말았다.
마지막을 앞둔 주목은 친절과 자애로움에서 희망을 엿보고 있다. 주목의 외로움을 알아보고 친구 나무를 심어주려 한 작은 소녀, 그리고 킬라니(Killarney) 숲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도록 만든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주목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그리고 숲의 여왕 주목은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될 자명한 사실 하나를 마지막 메시지로 던진다.
우리 식물들은 인간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우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나무와 식물, 자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들은 인간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나무의 언어를 귀담아 들으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