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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Aug 10. 2018

15. 사회적 모성과 사회적 동심

창의적이 되고자 한다면, 약간은 아이인 채로 있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성인 사회 속에서 불구가 되기 전에 가지고 있는 창의성과 창조력을 가진.  If you want to be creative, stay in part a child, with the creativity and invention that characterizes children before they are deformed by adult society. 

–– Jean Piaget. Swiss philosopher 1896-1980 


모든 남성에게는 얼마정도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다. 남성 속의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한다. 아니마는 남성 속에 있는 여성적 인격 요인인 동시에 여성에 대해 품는 심상인 여성성의 원형이다. 남성 속의 아니마가 지닌 원형은 태초의 어머니·여성 예언자·사랑의 여신이라는 모습을 가진다.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작고 여린 존재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여성과 남성을 가릴 것 없다. 

동양 전통의 사단(四端)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인 마음이다. 맹자가 말한 사단 중 측은지심과 사양지심은 아니마와 관련이 깊다. 남성은 우선 아니마를 발견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가치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던 것들을 인정해야만 한다. 작고 여린 것들을 보살피는 일과 양육 등은 과거의 아버지된 이들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었을까. 남성은 아무래도 아니마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니마를 발견한 남성은 이제 그 가치를 인정하는 단계로 가야 한다. 

그러나 사태를 개개의 가정과 아버지의 책임으로 떠넘기면 아니 그래도 힘든 부모 역할에 더욱 과중한 짐만 지우게 되고 사태의 본질은 더욱 흐릿하게 된다. 아니마는 그늘 속에 있는 흐릿하고 가치가 낮은 것을 지각한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성공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보다는 모성과 동심을 그래도 우리 아이들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 존재의 목적이 아닐까? 남성은 확실히 여성에 비해 편하다. 우리 안의 아니마를 두고 멀리 도망가지만 않으면 된다. 

아니마는 결합과 관계의 원리로 규정된다. 따라서 아니마는 관계형식을 그 모습으로 삼는다. 남성이 자신 안의 아니마를 발견하고 그 원리와 형식을 활용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자연 생태를 살리는 바탕에 있는 자연에 대한 존경이 아니마에서 나온다. 그뿐 아니라 가공할 속도로 어지럽게 분열되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결합과 공동의 힘’이 역시 아니마에서 나온다. 아니마는 남성의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기에 무의식 속의 영감을 느끼게 하고 작품이나 사상을 낳을 수 있도록 창조력에 관여한다. 

세상과 우리 아이들은 아니마의 출현을 고대한다. 창조인 감수성은 타인들뿐 아니라 남성들 자신을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성의 구원은 아니마에 달려있다. 그늘 속에 방치된 무의식적인 정신 요소인 아니마를 인정하고 통합하는 작업에서 구원이 생겨난다. 

여성의 경우 ‘아니무스’의 작동을 스스로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아니무스는 여성에게 있는 남성적 성질이다. 이는 내면적 인격이고 정신적인 과정이다. 모든 남성들에게 아니마가 있는 것처럼 모든 여성에게 아니무스가 존재한다. 그러나 아니마와 달리 아니무스는 여성의 생활 속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에 아니무스를 잘 활용하는 여성은 ‘강인한 의지·목적의식·활동성과 행동력을 적절한 힘으로 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타인에 대한 강박적 의존성 역시 아니무스의 작용이라 한다. 즉 자기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지 않고 주변에 휘둘리는 여성의 경우 내면 속의 남성성에 휘둘린다. 만약 여성이 아니무스에 일체가 되면 전반적인 불만족감과 생활감정의 상실 등 생활을 약탈당하는 큰 화를 입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니무스의 모델이 된 대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단념이다. 

남성은 아니마를 발견해야 하는데 비하면, 억울하게도 대부분의 여성은 아니무스의 조언을 듣게 된다. 아니무스는 그 여성에게 명령하고 금지하고 충고한다. 아니무스는 권유나 강요의 형식으로 활동하기도 하지만, 심상 즉 이미지를 지배하는 힘을 그 사람에게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념 같은 형태로 여성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힘으로써 아니무스는 여성에게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권위와 암시를 구사한다. 

여성 정신학자인 에마 융조차 아니무스에 맞서려는 여성에게 권유하는 것은 용기와 의지와 자신감이다. 아무리 마초인 남성에게도 아니마가 있는 것처럼, 모든 여성에게 아니무스가 있다. 불행히도 남성에게 아니마가 억제되어 있듯, 여성에게 아니무스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남성의 경우는 아니마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고, 여성의 경우는 아니무스를 우선 들여다보고 이를 단념한 뒤에 앞서 살핀 대로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경로와 방도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 하면 여성이 아니무스를 자기 자신과 잘 구별한 다음 자기를 잘 지킨다면 아니무스는 창조의 힘이 되어 여성이 ‘더 높은 의미에서의 존재가 될 수 있고, 본래의 인간적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도와준다. 

남성이 가진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하니 어떤 남성이든 마음 속에 소녀와 아줌마와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기에 남성도 모성을 지닌다. 아기의 작고 부드럽고 토실하고 축축하고 여린 손을 잡을 때면 아무리 마초라도 자신 안의 모성을 느끼게 된다. 아니마라는 남성의 여성성에 보살핌과 양육에 대한 토대가 있다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성은 어머니만 가진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공히 모성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 사회 자체가 인간을 길러내고 양육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가는 원리로써 ‘사회적 모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인간는 동심을 내버릴 수 없는 존재이다. 화성탐사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NASA의 과학자들이 한결 같이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간 듯’하다고 그 감격과 기쁨을 말했다고 한다. ‘월급이 두 배 오른 것만큼 기쁘다’라고 말하는 과학자는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러브 스토리>등 로맨스물에서 애인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을 묘사하면 늘 나오는 장면이 바로 ‘나잡아 봐’이다. 행복의 원형 상징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시절로 표상된다. 우리 모두에게 동심이 있으며 이 동심이 사회 안에서 작동하기에 좋을수록 사람들은 행복감을 느낀다. 역시 ‘사회적 동심’을 어떤 지향으로 삼을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제도와 시스템이 받침해 줄 부분이 있다. 먼저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생존의 공포로 구성원을 몰아가는 사회는 어차피 희망이 없다. 수 백만명의 비정규직 아버지 어머니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생존의 최저선을 넘나드는 대우를 받으면서 늘 해고의 위험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 같은 곳에 일한다. 이렇게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 퇴근하여 자상하고 부드러운 부모가 되기는 어렵다. 

비정규직은 아동학대와 표리의 관계를 가진다. 이 사회의 작동 원리가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인 한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경쟁력이 없는 사회를 만들게 된다. 삶의 지표와 축이 시장과 돈인 사회는 무너지도록 되어 있다고 제러드 리프킨이 말하였다. 삶의 축은 충만감이 되어야 한다. 삶의 목표는 삶의 지속이어야 한다. 충만한 삶의 지속이 목표가 아니라 남들보다 잘사는 것이 목표인 한 우리는 영원히 불행과 어둠 속으로 침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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