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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Sep 03. 2018

24. 놀이의 생태학

사람들은 놀이가 중대하고 진지하다는 것을 쉽게 잊는다. People tend to forget that play is serious.  

– David Hockney. Contemporary British painter 


놀이와 생태학은 서로 어울리는 조합일까? 놀이는 가볍고 신나고 사소한 느낌을 주는 반면 생태학은 무겁고 음울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듯하다. 생태학이나 생태계라는 말을 듣게 되면 보통 ‘생태계가 위기에 처해있고, 그 다음은 우리 인간의 차례’라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게 된다. 온실효과니 온난화니 엘니뇨 현상이니 하는 말도 그리 살갑진 않다. 언론이나 주변에서 위기라고 떠들어도 우리의 일상생활의 리듬이 급박하게 돌아가진 않는다. 환경오염이니 수질오염이니 토양오염이니 하는 말이 여기저기 떠돌아도 당장 우리 자신이 그로 인해 큰 손해를 보는 일은 드물다. 생태학이니 생태계니 유난스레 호들갑 떠는 몇몇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달 후에 전 인류가 환경 재앙에 휘말리게 된다고 해도 정말 급박한 것은 이번 달 카드 결제와 은행 융자금의 상환일이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에 비해 생태학은 전혀 유쾌하지도 않고 긴절하지도 않다.  

놀이는 어떤 생명력을 가지긴 하지만 생명체는 아니다. 생명이 없는 것의 생태학이 가능한가라고 물을 수 있겠는데 생태학은 생물학이 아니다. 생태학은 태양이나 물, 공기 등등 생명체가 아닌 환경도 연구한다. 따라서 놀이를 비유적 의미의 생명체로 보든지 인간과 일부 동물이 재미삼아 간혹 하는 활동으로 간주하든지 놀이의 생태학이 가능하다. 놀이는 워낙 보편적인 현상이며 호이징가가 지적했듯 “인간은 놀이를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으므로” 아주 넓게 보아 인류를 하나의 거대한 놀이생태계play ecosystem라고 간주할 수 있다. 월드컵 기간에 지구촌 이곳 저곳에서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사람들을 지구적 차원의 놀이생태계라 할 수 있다.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놀이생태계를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보다 작은 단위에서 놀이를 매개로 만나는 둘 이상의 사람들을 놀이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본서에서는 어린이들의 놀이생태계를 집중해서 살피려 한다. 앞으로 논의에서 ‘놀이생태계’는 어린이들이 모여 놀이하는 비공식적이고 비형식적인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가리킨다. 교실이나 교회나 학원 등에서 정기적으로 아이들이 만나서 상호작용을 하는 또래집단이 형성되면 이 역시 놀이생태계의 하나가 된다.  

‘놀이의 생태학’은 호이징가의 역사적 놀이이론과 로제 카이와 Roger Caillois의 사회학적 놀이이론을 계승하며 동물행동학과 문화인류학 그리고 발달이론을 포함한 교육학의 이론적 통찰을 빌린 담론 체계이다. 놀이의 생태학 체계는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놀이생태계를 주 고찰대상으로 삼는다. 

아동들의 놀이생태계는 과거와 현재 미래 언제나 존재했으며 존재할 터이다. 어떤 사회 어떤 나라에도 존재하며, 그 모습은 약간씩 달라도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시대의 어린이들은 놀이생태계 안에서 많은 문화적인 자양분을 얻는다. 가족이나 지역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아동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며 아동을 사회화하고 문화적 지침을 제공하듯, 놀이생태계는 아동과 청소년에게 문화적 환경으로 기능한다. 놀이를 통해서 그리고 놀이과정(본서 놀이의 4차원 참조)을 통해서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고유한 가치체계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인 행동규칙을 익히게 된다. 놀이생태계는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작동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 아동들의 놀이생태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놀이의 생태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아동들의 놀이생태계는 수 백년 혹은 그 이상의 오래된 과거와 단절되었다. 이를 ‘놀이생태계의 교란’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놀이생태계가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놀이생태계가 달라졌다고 하면 그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지만 교란되었다고 하면 부정적이거나 위태롭다는 것 이상의 복잡성을 의미한다. 이를 기성 세대들이 어려서 즐겼던 수많은 놀이들을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다는 것 이상이다. 수 십년에서 수 백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두고 전해지고 진화해온 수많은 놀이종種들이 1980년대만 해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지만, 1990년대를 거치면서 십 몇 년 사이에 골목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세계화 덕분에 새로이 도입된 전자오락류의 외래종놀이가 놀이생태계의 우점종을 차지한다. 이런 놀이종의 대량멸종과 우점종의 변화도 놀이생태계의 교란의 한 양상이다. 이러한 놀이생태계의 교란은 그저 세상이 달라졌다거나 시대가 변했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놀이생태계의 교란에서 놀이종의 교체 만큼 중요한 것은 놀이 서식지의 축소와 그 성격의 변화이다. 자동차들이 골목을 점유하면서 골목이 해체되었고 일이 십 년 사이에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곳은 학교와 체험학습장과 태권도장과 학원 등 제도화되고 성인에 의해 관리되는 공간이 대부분이 되었다. 일상의 생활 환경 속에서 아이들만의 자율성과 자발성이 극단적으로 축소되거나 거세되었다. 놀이에서 자율성과 자발성은 핵심 원리인데, 성인들의 개입도가 늘어나면서 놀이생태계가 놀이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잃게 되었다. 

아이들이 지속성을 가지고 모여서 야구를 한다고 치자. 스스로 팀을 조직하고 멤버끼리 역할을 나누고 옆 동네와 경기를 주선하는 것도 알아서 하는 것이 전형적인 놀이생태계의 모습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회비를 내고 야구클럽에 가입하여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서 코치가 시키는 데로 훈련하고 정해진 팀과 시합하는 야구클럽은 놀이생태계이지만 자발성이나 자율성을 많이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권도장 등의 스포츠 클럽이나 학원이나 학교 등을 놀이생태계라고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소속감이다. 아이들이 어떤 곳에 소속감을 느끼고 그 곳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자율성이나 자발성 이 존재한다. 소속감은 놀이생태계를 규정하는데 일차적 기준이 된다. 온라인 놀이생태계인 디씨인사이드나 게임길드 등도 마찬가지이다. 

놀이생태계의 교란이 어떤 점을 말하는 건지 놀이생태계를 이루는 공간축, 시간축, 인간축 각각의 경우를 들어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과거 놀이생태계의 주된 공간이었던 빈터나 골목을 건물과 자동차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건물이 늘어나고 야산이나 들판이 사라지면서 도시의 골목은 놀이생태계의 주된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자동차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길은 실제로 위험하거나 위험해 보이는 공간이 되었다. 놀기에 적절하면서 위험하지 않은 공간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놀이생태계의 공간축을 자동차라는 놀이포식자가 삼켜 버렸다. 

20세기 초등학생들은 학교가 파한 뒤 길고 긴 방과후의 여유시간과 주말과 방학을 누렸다. 학원을 몇 곳 다니는 학생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처럼 학원 스케줄로 방과후를 빽빽하게 채우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온갖 학습지와 학원과 과제와 체험학습은 아이들의 여유로운 시간을 포식해 버렸다. 느긋하고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희소해졌다. 놀이생태계를 이루는 시간축이 수험산업

[1]

에 의해서 파편화되었다

어른보다 바쁜 초등학생들에게도 가끔 짬짬이 비는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까지 기다렸다 같이 놀아 줄 친구가 있을 리 없게 되었다

친한 친구들끼리 공 한 번 차려면 한참 전에 서로 시간을 맞추거나 틈틈이 비는 시간에 모니터를 대하는 등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게 되었다

놀이생태계의 인간축은 앞서 살핀 공간축과 시간축에 연관이 된다. 한국에서 놀이생태계의 공간축과 시간축이 무너지는 사태는 80년대 후반 동시에 일어났다. 바로 이때 마이카 붐이 일었고 전두환의 과외금지령이 실질적으로 사문화하게 된다. 그 와중에 골목대장과 놀이에 정통한 친구들이 급속히 사라진다. 골목대장과 놀이에 정통한 친구들은 골목마다 좀 달라서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골목대장은 주먹이 쎄거나 인간적 매력이 강하거나 등등 카리스마를 가지고 가까이 사는 또래집단의 수장이 되어 강한 영향력을 지닌 친구들을 말한다. 놀이에 정통한 친구들은 여러 놀이의 규칙과 잘 하는 요령을 익히고 있는 친구들을 말한다. 이런 친구들이 놀이생태계에서 급속히 사라지면서 놀이생태계의 인간축은 허물어졌다. 

이와 같이 놀이생태계가 교란된 이후에 성장하는 아동과 청소년에게서 놀이실조라고 할 만한 여러 증상이 발견된다. 대표적인 증상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 아동과 청소년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해를 거듭할수록 나빠졌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이 극단적으로 낮은 것도 역시 놀이실조이다. 더불어 교실붕괴라 불리는 다양한 현상도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놀이실조를 극복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접근이 필요할 것인데 우선은 놀이생태계를 좀더 가꾸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지금 상황에서 성인이 개입하여 아이들의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한다면 어떤 기준이나 모델이 필요할 터이다. 모델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로 할 수 있으며 최적화 기준은 ① 놀이 다형성 ② Play Bout(한 바탕의 놀이) ③ 놀이 맥락의 세 개념틀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최적화 기준을 잣대삼아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1]

태권도나 미술, 피아노 같은 예체능 사교육을 제외한 입시라는 특정 목표와 성인기의 수험에 도움이 될 목적을 지닌 사교육을 수험산업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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