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아동과 청소년에 관한 담론이나 의제는 불가피하다는 표현이 적실할 정도로 교육에 수렴한다. 아이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다보면 결론은 그냥 교육이 된다. 교육중독이란 것이 있다면 한국인들은 교육중독 중에서 중증 환자들로 보인다.
급식도 교육이라는 진보진영의 논리를 보아도 그렇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라는 변소의 스티커를 보아도 그렇다. 먹고 싸는 것이 모두 교육의 영역에 속한다. 심지어 교과부에서 강제하는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것이 무려 '체험 학습'이다. 일제고사와 그것이 일으키는 파장이 얼마나 반교육적인지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결국 '학습'이라니 약간 안쓰럽기까지 하다.
90년대 이후 청소년 회관(센터), 방과후 공부방이나 대안학교 등 학교 바깥의 아동 청소년 공간이 늘어나긴 했다. 그러나 아동청소년의 삶과 관련하여 교육과 무관한 교육 외부의 어떤 것을 상상하고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진 것은 드물다. 교육 외부에 관한 담론이란 게 있는지 의문이고 없다면 새로이 만드는 것이 가능한 지 더더욱 의문이다.
교육 외부를 상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잠시만 따져 보자. 전두환의 유일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과외금지 덕분이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세대는 6년간 거의 내내 놀기만 했던 좋은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과외금지가 위헌 판결을 받은 이후에 성장기를 보낸 이들은 그 세대에 비해 '더 이른 나이에 더 좋은 교수법으로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80년대 후반부터 조기교육은 대세가 된다. 과외금지 세대 보다 좀 앞선 세대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시때문에 국민학교부터 '더 이른 나이에 암기 위주의 교수법으로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과외금지세대는 공부라는 것을 중3쯤 해서 연합고사 준비를 위해 시동을 걸었다.
(수험공부가 교육인지 아닌지 성찰하는 건 정말 중요하지만 적어도 한반도에서 교육이 신분상승을 위한 수험공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었던 사례는 희소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교육이라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면, 다시 말해 더 어린 나이부터 더 많은 뭔가를 머리 속에 쑤셔넣고 선다형 문제를 푸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면, 과외금지 세대는 그 앞뒤 세대에 비해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뒤쳐지는 것이 관찰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세대가 그 전후의 세대에 비해 인지능력이나 판단력 같은 것이 뒤쳐진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근대적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개개인 사이의 능력차는 얼마간 있을 지 몰라도 특정 집단간의 능력차란 미신이나 주술의 영역에 속한다. 간단히 말해서 어려서 아무리 놀았건 반대로 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았건 성인기에 어떤 차이를 가져 오지는 않는다.
여하간 교육이라는 것이 피교육자에게 미치는 영향에는 임계치같은 것이 있는 듯 하다. 인간은 일정한 양이나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으면 능력의 발전과 계발이라는 측면에서 보아 의미를 가지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누구나 열심히 하고 좋은 교육을 많이 받으면 아인슈타인같은 학자가 되거나 우사인 볼트 같은 세계 기록 보유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정치성향의 좌우를 막론하고 교육 외부의 것을 통해 아동청소년들의 삶이 변화될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는다. 이것을 교육중독이라고 하자. 영어태교와 영유아 영재교육부터 시작하여 끝간데를 모르고 가방끈을 늘이도록 강요받는 청년들도 교육중독이다. 그런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고 수험산업을 창출하고 유지하면서 돈을 지불하는 기성세대들도 교육중독이다. 엄밀히 말해서 교육의 한계를 상정하지 못한 채 교육만능의 신앙 속에서 교육 외부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교육중독이다. 서구의 교육학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성교육이라는 개념을 특별한 합의 없이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현실 자체가 우리의 교육중독 중증을 증명한다. 한국인들 대다수가 교육중독이면서 이를 크게 문제삼지 못하거나 아예 그 증상이 남다르다는 것 조차 모르는 건 이 나라의 교육과 수험과 계급의 연관이 워낙 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아동 청소년 청년 세대에게 어떤 교육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가 아닐 수 있다. 교육이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이 교육 보다 오히려 더 시급할 수 있는 것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그들과 기성세대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어떤 즐거움을 어떻게 함께 누릴 지를 곰곰히 사려하고 모델을 실험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식상한 말 대신에 그 가능성을 잠깐만이라도 생각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책임감에 쩔어서 자신과 아이들의 삶 조차 부스러뜨리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기 일쑤이다. 정확하게 현실을 보자. 아이들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방법 따위는 없다. 대신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겠다'는 마음, 장난기, 사회적 동심이 우리 모두의 삶을 다시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