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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Sep 03. 2018

22. 사교육이냐 수험산업이냐

어른들은 놀이하면서 또 다른 실제 속으로 비스듬히 걸어 들어가며, 아이들은 놀이하면 서 숙달의 새로운 단계로 전진해 나아간다.  The playing adult steps sideward into another reality; the playing child advances forward to new stages of mastery. 

–– Erik H. Erikson. American psychoanalyst 1902-1994 


교육열은 아이가 좋은 교육을 잘 받아서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의미도 가지지만 ‘학습지를 미뤄두고 놀거나 시험과 무관한 서적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를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는 뜻이거나 ‘내 자식의 성적이 최상위권이면 좋겠다’나 ‘내 아들딸이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는 입학해야 된다’는 뜻도 된다. 필자는 95년부터 여러 학원과 학교에서 영어를 수업했지만, 영어 시간에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는지 관심이 있는 학부모는 드물었다. 그저 숙제 많이 내주고 단어시험 많이 보고 성적 잘 나오면 끝인 부모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말이다. 진정한 의미의 교육열이라면 학생들의 호기심이나 흥미를 유발할 가능성이 소수점 이하에 불과한 교과서를 그나마 1년에 달랑 1권씩 보도록 되어있는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교과과정이 과연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학생들의 영어에 대한 관심에 어떤 방식으로 함수관계를 맺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한국에는 교육열 따위는 없다. 2008년이 건국 60주년이었다는데, 이 나라는 건국이래 입시라는 꼬리가 교육이라는 몸통을 계속 흔들어 왔기에 입시를 교육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상으로 보이고, 획일적이고 단일한 기준의 입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대부분의 나라에 대한 얘기를 하면 비현실적이라거나 세상 물정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렇게 극소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게 된 사례가 사교육이다. 대체로 사교육이라는 완화되고 미화된 표현을 쓰지만 엄밀히 따지면 수험산업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보통 2차 산업이 물질적인 차원의 공해를 유발한다면 수험산업은 정신적인 차원의 공해를 유발한다. 수험산업은 놀이포식자이자 놀이생태계를 파괴하는 오염원이다. 무엇보다도 수험산업은 아동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위협하는 공해산업이다. 

사교육은 공교육의 반대말로 매우 너른 영역을 이른다. 제도권의 학교와 기관에서 이뤄지는 교육행위가 아니면 모두 사교육이다. 개개인이 재원을 마련하여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하는 모든 행위는 사교육에 속한다. 아이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으면 공교육이지만, 용돈을 모아 책을 사서 읽은 것은 사교육이다. 또한 표준적인 교육과정을 거부하고 대안학교를 선택하는 행위도 사교육에 속한다. 대중을 위한 공교육이란 게 기껏해야 이삼 백 년 된 것이고 그 이전의 교육은 극소수의 국립 엘리트 교육기관이 아닌 경우 모두 사교육이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사교육은 보통 입시에 도움이 되고 지필고사에서 남들보다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행위들을 말한다. 사교육 그러면 학원을 말하는 거고 학원이 문제라고 하면 결국 시험을 대비하는 학원이 문제라는 얘기다. 우리에게 좋은 사교육과 나쁜 사교육을 따져 논할 여유가 없으며, 이미 ‘나쁜 사교육’은 우리 국민 경제에서 가장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 거대산업이 되었으므로 필자는 사교육이라는 말을 피하고 대신에 ‘수험산업’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사교육’은 아동과 청소년들이 대입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의 준비 단계를 위주로 말하게 되지만, 수능 이후 성인들이 공무원 시험과 각종 고사를 대비하며 받는 학원교육까지 의미할 때 ‘수험산업’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이미 닫힌 구조로 되어있는 우리의 상황을 풀기 위해 모두가 다 알고 있을 법한 문제들을 다시 검토해 보자. 학력에 따른 차별이 전혀 없는 나라는 없겠지만 한국에서는 그것이 지나치게 과격할 정도로 존재한다. 한 두 번의 시험과 그 시험 결과에 따른 선발이 구성원들의 일생의 경제력과 자아상을 결정한다. 합리성이나 합목적성에서 함량 미달이라고 봐도 무방한 여러 시험들이 인생의 여러 단계에서 진입장벽으로 존재한다. 교사가 되려면 교육학과 전공과목을 시험보고 통과해야 한다. 대기업에 취직하려면 토익 고득점은 필수다. 그런데 교육학에 대한 지식의 다소가 교사로서의 적격여부를 가릴 수 있는 걸까? 혹은 토익 등의 시험에서 고득점 여부가 기업에서 직무 능력과 연관성이 있는걸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불안감을 피해갈 수 없는 사회구조 하에서 수험산업은 진입장벽에 대한 편리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동시에 중압감을 가한다. 공교육은 최소한도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선에서 교육과정을 꾸려나가기에 진학을 위한 시험을 최우선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각 취학 단계에서 받는 교육이 최소한의 합리성을 가지고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시험은 함량 미달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사이에 우리는 선발 절차에 대한 합리성을 보완하기 보다는 공교육에 대한 불신감을 키웠다. 

우리 한국인의 삶은 하루하루가 다를 정도로 불안감과 무력감이 커진다. 진입 장벽이 없는 곳에서 조차 경쟁이 과열되었고, 이제는 초등학교 입학 전의 시기마저도 어른들의 관리와 상업화된 수험산업의 마케팅 영역이 되었다. 본인은 몰라도 자녀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도록 하지 않겠다는 삶에 대한 불만족이 저변에 팽배해지면서 태아를 위한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상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놀이 생태계는 교란 수준을 넘어서 황폐화되게 되었다. 

수험산업은 말 그대로 수험 산업이다. 교육이라면 시키는 게 맞지만 산업이기에 우리는 그들의 고객이 될 것인지 아닌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수험산업은 우리 마음의 가장 취약한 두 부분을 공략한다. 하나는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부분이다. 우리는 늘 불안하다. 거짓된 위로인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면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하나는 “내 아이는 남들보다 ····혹은 나보다 ····”라는 부분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어쩔 수 없지만, 내 아이의 미래는 달라야 한다.”는 자녀에 대한 기대감과 보상심리의 결합이다. 자식이라는 이름의 타인은 우리 마음의 가장 부스러지기 쉬운 방벽이다. 수험산업은 간단히 말해서 보험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수험산업을 정신적 공해 유발산업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수험산업이 기반한 정서가 공포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혹시나 남들보다 뒤쳐지만 어떻게 될 지 무섭기에 5살난 아이에게 초등학교 과정을 선행시킨다. 남들이 선망하거나 적어도 낮춰 보이지 않을 대학에 내가 혹여 진학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 지 무서워서 실제로 공부할 시간에 그저 공부라는 핑게로 시간을 때운다. 공포에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생겨나진 않는다. 공포는 그저 인간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 먹을 뿐이다. 현재화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로 유지되는 공포산업이 수험산업의 정체다. 

부모인 우리들 자신이 수험전쟁의 희생자들이었다. 이 점을 자주 그리고 곰곰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백만 명의 수험생 중에서 인문계 수석과 자연계 수석 두 명의 승리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패배자가 되는 전쟁을 우리는 겪었다. 물론 본인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한 경우를 승리라고 하면 승리자는 몇 명 선에서 몇 천명 선으로 올라 갈 수 있다. 그 이전에 연합고사라는 시험에 의해 고등학교 입학자격을 얻지 이들도 많다. 우리는 교육이라기보다는 사육이나 입시전쟁을 대비한 훈련을 받아온 것 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이 우리들에게 미친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졸업 후 오히려 더욱 경쟁이 심해진 사회 생활 속에서 우리는 우리 몸에 ‘경쟁’이라는 것을 하나의 생존지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경쟁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 삶의 실상이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미래의 삶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복합성과 전혀 무관하게 우리는 이미 내면화된 ‘전쟁’이라는 이미지가 일러주는 전쟁교본을 따라 아이들을 내몰고 있다. 그 끝을 향해 계속 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적어도 행복은 아닌 듯하다. 

정성이 문제다. 우리는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쏟고 공을 들이면 뭔가가 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돈을 투여하면 뭔가가 산출된다는 생각에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그렇게 해서 성장할 수도 있지만 망가질 수도 있다. 물건은 그렇게 해서 더 개량될 수 있고, 상품은 비쌀수록 더 좋은 품질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우리 인간은 양육을 맡은 자의 정성에 비례해서 발달하고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아동기에 받은 부모들의 정성과 현재 우리의 모습이 비례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오히려 정성이 독약이 되는 가능성이 있다. 정성의 정반대인 방임에 실제로 우리가 처한 미로의 출구가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성이라는 표현으로 아동에 대한 조작과 학대를 위장한 것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사교육이라고 지칭되는 것이 정말 문제라면 그것을 풀기 위해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지난 이십 여년 간 접근해 보았지만 결코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산업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좀 다른 해법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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