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놀지 않는 사람은 내면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A child who does not play is not a child, but the man who does not play has lost forever the child who lived in him.
놀이생태계라는 용어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도 있고, 놀이생태계의 중요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터이다. 그런 이들도 주거 지역에 기반한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또래집단의 안정성과 지속성이 지금은 허물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전래놀이, 민속놀이, 골목놀이의 놀이종들이 이미 멸종된 것이나 다름 없으며 적절한 서식지가 파괴되었고, 사회적 공간적 변화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수 만년에서 길게 보아 수 백 만년 간 잘 작동해온 놀이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는 큰 변형을 겪었다. 이를 놀이생태계의 교란이라 한다. 한국 어린이들의 놀이생태계가 20년 정도의 짧은 기간 사이에 현격하게 교란된 사태의 원인을 살피려 한다.
서양에서의 자동차는 현대라는 시간을 만들고 진화시키고 스스로 종료시켜서 21세기를 맞게 되었다. 그 동안 수많은 자동차들이 생겨나고 또 사라졌고, 또 자동차들의 진화도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된다.
놀이 하나하나를 살아있는 생물종이라고 치면 불과 일이십 년 사이에 많은 놀이들이 사라진 21세기 한국은 놀이 대멸종의 시대다. 한국의 놀이생태계가 단기간에 교란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잠깐 살펴 보았듯 자동차와 도시화는 놀이생태계의 서식지를 파괴한 ‘놀이 포식자 playpredator’이다. 놀이생태계의 공간축이 도시와 자동차라는 놀이 포식자에 의해 교란되었다.
놀이생태계의 전통적인 공간은 골목과 마을이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던 이런 공간이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마이카붐을 지나면서 닫힌 공간 내지는 위험한 공간이 된다. 80년대 후반을 자동차 등록대수가 비약적으로 늘면서 한국의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부유층이 차고와 운전수를 두고 자동차를 소유했지만 80년대 중반과 후반의 몇 년을 거치면서 중산층들이 대거 자동차를 구매하고 소유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마이카족들은 집에 차고를 둘 만큼 큰 집을 소유하진 못했으므로 도시와 주택가 이곳 저곳에 비어있던 공간은 차들이 점유하기 시작했다. 놀이생태계의 주된 놀이서식지인 도시의 빈틈을 주차장과 과밀한 주거공간이 삼켜버렸다. 골목이 안전하지 않게 되자 부모들은 집 밖으로 자녀들을 내보내기가 꺼림칙하거나 두려워하게 되었다. 실제로 아동관련 교통사고가 급증하였고 도시는 아동에게 적대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예전에 아이들이 모여 몸을 놀려 달리고 뛰고 놀 수 있었던 도시의 허다한 빈 공간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사치품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다양한 놀이가 살아남기 어려웠다. 반면에 자동차의 불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농산어촌은 재래종 놀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사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아이들이 사라졌다.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고향을 등지는 흐름이 70년대와 80년대를 이어갔다. 70년대 이후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 놀이생태계의 구성원이 될 만한 어린이들은 그 부모들이 향촌을 떠나면 당연히 따라갈 수 밖에 없었고 고령자들이 주로 남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걸어 다닐 만한 거리에서 또래집단을 이룰 정도의 아동 인구를 가진 향촌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아이들의 놀이생태계가 조성되려면 걸어서 걸어 다닐 만한 거리에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일정한 숫자를 이루어야 하지만 그런 조건을 가진 곳이 점점 줄었다. 아이들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 하거나 어른들이 차로 태워줘야만 했다. 역시 공간의 제약이 문제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향촌 지역을 먼저 온라인 네트워크한 결과, 촌락의 아이들은 도시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외래종 놀이를 대표하는 전자매체의 놀이를 즐기는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농산어촌보다는 아이들이 많이 남아있는 소도시의 놀이생태계도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수험산업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린이들을 강제로 공부시켜서는 안 된다. 놀이로써 공부하게 해야 한다. Do not ···keep children to their studies by compulsion but by play.
수험산업은 놀이생태계의 시간축을 무너뜨린 놀이 포식자다. 한국말고는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만큼 기괴할 정도로 비대해진 수험산업은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놀이할 시간을 박탈했다. 주거지 가까이에 아동들의 안정적인 또래집단이 형성되어 놀이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공통의 시간이 사라졌다. 방과후와 방학 같이 전통적으로 어린이들이 모여서 놀이하던 시간은 미분화되어 사라졌다. 학교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학원과 프로그램이 앞 다투어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놀이할 시간을 포식했다. 방과후와 방학은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동들은 하루 내내 그리고 일년 중 며칠을 제외하고 학업노역에 강제 징용된다. 90년대만 해도 간혹 존재했던 안정적인 놀이생태계의 모습은 이제 TV의 다큐멘터리물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수험산업은 놀이생태계의 지속성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포식자이다. 학원을 다니게 되면 아이들의 시간은 파편화되어 방과후의 시각은 아이마다 요일마다 조각조각난다. 친한 친구끼리 방과후에 단 한두 시간을 같이 보내려면 서로의 학원 스케줄을 완벽하게 파악해서 빈틈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억지로 만들어내야만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뭔가를 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고스란히 활용하기 힘들다. 고학년이 될수록 자유로운 시간은 줄어든다. 놀이생태계의 지속을 위해서는 다양한 놀이에 익숙한 고참 아동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아동을 주변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수험산업이 아동의 지적 육체적 성장에 여러 모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오히려 저해가 될 수 있는 점, 즉 조기교육의 부작용이나 위험성에 대한 담론은 적지 않다. 선행학습으로 대표되는 조기교육은 어린 아이들의 정신적 능력을 수험산업의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이다. 소아정신과 전문의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임상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조기교육이 아동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증거는 없다. 조기교육이 아동에게 유익한 점이 있다고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기교육 때문에 피폐해진 아이들의 삶을 증명하는 담론은 적지 않다.
이런 조기교육 폐해론이 종종 간과하게 되는 것이 있다. 수험산업이 아동과 청소년을 지속적으로 관리·감독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아동과 청소년은 늘 성인인 강사와 부모의 관리 속에 있게 된다. 수험산업의 상품들 중에서 고가에 속할수록 아동들은 어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고 어른들의 제재를 자주 받게 된다. 따라서 아이들만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자신들의 역량 안에서 이루어지는 중재와 교섭과 세력균형을 경험하고 연습할 기회가 적어진다. 외부적 권위와 힘과 타율적 질서에 순응하는 성향을 가지기 쉽게 된다.
또래집단 속에서 경험하는 여러 만남은 좌절과 같은 부정적인 경험을 주기도 하지만 그 좌절감을 상쇄할 다른 전략의 수립을 돕는다. 보통의 아이들은 한 번의 좌절로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이 사람들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성장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 그 판단에 따른 관계 형성 그리고 전략의 수정과 재정립 등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일들을 놀이 생태계라는 문화적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면서 성장한다. 이와 같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자아를 형성하면서 차후의 청소년기와 성인기에도 적용가능한 어떤 자기신뢰감을 쌓게 된다. 인류가 살아온 방식은 늘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의 농도와 총합을 박탈한 것은 가장 치명적인 실수다.
상상력의 놀이에 우리가 지고 있는 빚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The debt we owe to the play of the imagination is incalculable.
한국에서 놀이에 대한 이론을 가장 열심히 연구하는 이들은 게임 개발자들이다. 몰입도 또는 중독성이 강한 게임이 그냥 감으로 개발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놀이가 사람을 매혹시키는 메커니즘에 대해 철저히 이론적 분석을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건 게임을 만드는 것이 즐거워서건 충분한 동기가 있다.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며 다양한 서사와 음향과 화면으로 몰입도를 높인 전자매체 놀이를 넘어설 놀이는 없다. 이러한 전자매체를 이용한 새로운 놀이에 대한 찬반 양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진다. 이러한 게임을 놀이의 범주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통상 게임을 지칭하듯 오락이라는 놀이의 아종으로 볼 것인가도 애매한 문제이다. 온라인 게임 등은 놀이의 특성을 많이 가지므로 놀이이되 아종으로 보는 것이 현재로선 타당할 듯 하다. 다만 자연스럽게 수용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물밀 듯 들어온 놀이종으로 보아 ‘외래종 놀이’라 칭하겠다.
아시아 남방 지역의 광대한 지역을 조사해 보니 놀이들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예를 들어 ‘꼬리따기’라는 놀이는 아시아의 농경지역이나 수렵과 농경을 겸하는 지역에만 전파된 놀이이다. 농경민이 사는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생활하는 수렵민들은 꼬리따기 놀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놀이는 어떤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지만 수용되지는 않았다. 특정한 어떤 놀이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려면 놀이의 수용자 집단이 그 놀이를 향유할만한 사회문화적 맥락이 있어야 했다. 외래종 놀이가 전파되려면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어야 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유사해야 한다. 한국의 전래놀이들도 유래한 곳을 찾으면 외래종 놀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화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흐른다. 현대인들이 믿는 고유의 전통은 대개 과거의 외래종이었다. 결국 어떤 놀이가 외래종이나 아니냐는 부차적인 질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놀이와 사회는 조응한다. 하나의 사회구조는 어떤 특성을 가진 놀이를 낳으며 사람들의 생활감정과 생활공간에 맞는 놀이가 널리 퍼진다. 전자매체놀이는 현대사회와 긴밀히 조응한다. 적을 궤멸시키든, 공주를 구하든 뭔가 임무가 주어진다. 임무 수행 중 모험을 하면서 역할을 담당한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성과가 누적되면 레벨이 오른다. 레벨이란 노골적인 순위 매기기이다. 비교가 이보다 간명해지긴 어렵다. 이러한 게임의 구조는 현대인의 삶의 구조와 거울상처럼 맞아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안타깝긴 하지만 이것이 놀이의 시대성이다.
우리시대의 놀이생태계에서 이미 우점종이 되어버린 이 외래종놀이는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도태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황소개구리는 적어도 생태계를 교란시킨 다음 포식할 대상이 없어지면 스스로 멸종하기라도 하는데, 이 외래종놀이는 포식할 놀이가 없어도 어린이와 성인 게이머가 살아 있는 한 없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외래종 놀이라고 싸잡아서 비판 이상의 힐난을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문화는 흐른다. 문화가 전파되면서 놀이도 확산된다. 놀이에서 토착종·고유종을 찾는 일은 민속학에서 훈고학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긴 하지만, 현실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방해할 수 있다. 문제는 전자매체 놀이 말고는 옵션이 없는 현실이다. 아이들이 잘 뛰어 놀지 못하는 현실도 문제다.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없게 만드는 여러 겹의 구조가 우리 모두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그런데 온라인 게임이나 닌텐도 등 외부에서 강제된 규칙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놀이들이 놀이생태계의 우점종이 된 이후에 아이들이 스스로의 합리성으로 규칙을 변형하거나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판단력이나 상상력이 조금씩 고갈되는 징후가 있다. 10명이 하던 놀이를 너댓 명이 하기 위해 놀이규칙을 바꿀 필요가 있다. 각각의 놀이맥락에서 규칙이 불합리하다면 아이들끼리 협상을 통해 규칙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그에 반해 전자매체의 놀이는 놀이 규칙을 강박으로 따라야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갈등상황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전략을 통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아이들에게서도 그대로 보여지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표면화된 갈등을 무마시키면서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말하지만 좋은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일 수는 없다. 친구들간의 관계에서 갈등을 무서워하기만 해서는 건실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현대의 아이들 중에 극단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관계망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자신의 공격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자주 보이는 반면, 갈등에 직면하는 것을 과도하게 두려워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게임 때문에 어리석거나 부정적인 사건을 저지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대척점에 서서 이런 게임이야말로 21세기의 주인공이 될 미래세대에게 필수적이고 중요한 훈련으로 기능한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매체의 외래종 놀이를 무조건 지탄하는 것은 그런 놀이를 무조건 미래지향적인 우월한 놀이로 칭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현재로선 두 진영 사이 어딘가에 진실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을 하나라도 말하자면 몰입도라는 측면에서 전자매체의 현대적인 놀이는 과거의 놀이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대인이 일상적으로 하는 어떤 활동도 전자매체를 이용한 게임보다 몰입도가 높은 경우는 찾기 어렵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현재로서는 이런 놀이가 놀이생태계의 우점종을 넘어 독점종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탐색은 이 시대 어린이들의 일상을 변혁시키는 작업이다. 아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학습지와 모니터를 대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은 한국의 현실에서 이들이 집 밖으로 나와서 가까이 사는 아이들끼리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역량으로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어보는 시도를 해보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새로운 기회를 가지면서 능동성의 감각을 키우는 경험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이러한 환경이 제대로 만들어졌는가를 따지는 기준은 ‘놀이 다형성 play diver-balance’이 될 터이다.
다형성은 ‘다양성과 균형점diversity and balance’을 아우른 표현인데 외래종놀이의 가장 큰 문제는 그로 인해 놀이다형성이 파괴되었다는 점이다. 현 30대 이상이 어렸을 때 익숙한 놀이는 모두 언니·오빠·형·누나에게 전수받은 놀이들이 많았다. 이 놀이들은 모두 생명력이 다했다. 놀이생태계에 새로 진입한 신참 아동이 깍두기부터 시작해서 골목의 고참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경험은 문화자본이나 슈퍼에고와 관련하여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아이들이 발휘할 수 있는 기량이나 능력이 놀이마다 상당히 달랐다. 구슬치기를 잘 하는 아이가 뜀박질을 잘 못할 수 있었고 공을 잘 던지고 잘 받는 아이가 딱지치기를 하면 늘 잃기만 하기도 한다. 다양한 놀이는 다양한 개성과 연관이 된다. 놀이의 균형점은 아이들마다 선호하는 놀이가 사뭇 다르다는 말이다. 놀이 다형성이 잘 갖춰진 환경은 다양한 놀이를 누릴 수 있으되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놀이를 찾아서 자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시험해 볼 환경을 이다. 아동들은 성장 환경과 발달 단계와 개성에 따라 놀이 선호도가 다르지만, 다양한 놀이를 가급적 균형 있게 누릴 기회가 필요하다.
원인을 살피는 작업은 현 시대에 맞는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하기 위한 조건을 궁리하는 데 필수적이다. 놀이생태계의 교란은 공간과 시간과 인간이라는 세 가지 조건, 즉 ‘놀이의 삼간’이 놀이포식자와 외래종에 의해 과거와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해서 다음의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이 셋 중에 현재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는 공간축이다. 공간문제 때문에 과거의 놀이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제라도 대도시를 떠나서 전원으로 돌아가 목가적인 삶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야 수없이 많을 것이고 차들로 들어찬 골목에 진저리를 내는 사람도 그 이상으로 많을 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차들을 없애거나 도시를 완전히 해체할 수도 없으며 과거로 돌아갈 방법도 없다. 한국의 모든 아이들이 집 근처에서 안전하게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단번에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차츰 공간을 늘려나간다면 비용의 문제는 있겠지만 한국은 세계 제일의 토건공화국이니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다.
공간 문제를 푸는 작업은 각종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을 놀이친화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최우선의 관건이다. 현재의 놀이터는 다양한 놀이가 오히려 불가능한 시설로 가득차 있는데 무한히 다양한 놀이가 가능한 곳으로 놀이터를 전환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약간의 비용과 노력만 기울이면 동네 어른들이 모여 조기축구하는 곳으로 변해 버린 학교 운동장 역시 놀이친화적 공간이 될 수 있다. 도시 주변의 야산 언저리와 작은 공원들 역시 약간만 가꾸면 놀이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이런 작은 공간들을 꾸미는 것이 어른들에게는 중요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까이 사는 아이들이 이 공간에서 소속감과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지 여부이다.
놀이생태계를 최적화시키는 과정에서 어른들로서 가장 편하고 경제적인 부분이 바로 시간축이다. 유아기부터 수험산업의 진입단계로서 선행학습을 시키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임산부의 배에 대고 외국어(영어)로 녹음된 동화와 동요를 들려주며 태교라고 하는 사람들도 한국인뿐일 듯 하다. 어린 자식을 둔 부모들이 못나고 뭘 몰라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한국이라는 유별난 나라에서 적응하여 평생을 살아가려면 그 정도 훈련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태교를 위한 육법전서라든가 유아를 위한 인체 해부도 같은 것이 나오기는 어려울 테고, 다섯 살짜리에게 초등학교 과정을 앞질러 공부시키긴 하지만 중고등학교과정을 선행시키지는 않을 테니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가능성은 적다. 대부분의 한국 어린이들이 수험산업의 굴레에서 벗어나 얼마간이라도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은 한국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작업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하기 위해 시간축의 조건을 해결하는 것은 공간축의 조건을 푸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난하지만 해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의 인간축은 앞의 두 문제에 비하면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많은 논의와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현재의 어린이 놀이생태계를 진단하면 놀이의 다양성 자체가 붕괴되었다. 전자매체의 놀이가 우점종을 차지하고 몇 가지 구기와 자전거·인라인 스케이트 등 바퀴달린 것을 타기 그리고 음악과 미술과 소꿉장난이나 전쟁놀이·몸싸움 등 발달단계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놀이와 놀라운 생명력으로 21세기의 격랑을 헤쳐나가는 극소수의 옛놀이가 있다. 놀이의 전승 맥락과 놀이다양성이 무너지면서 어린이 놀이생태계는 바람직한 모습도 함께 잃었다.
골목이나 놀이터 등의 놀이서식지를 점유하면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아동들은 방치에 가까운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모여서 놀이생태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방치에 가까운 상태로 지내는 아이들은 그 부모가 허용적이거나 방임적인 경우도 있지만, 권위적이면서도 부모로써 바람직한 역할상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과소하거나 과다하면서 가족 구성원에게 언어 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밑에서 상처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놀이생태계에 영향을 끼치기 쉽다. 이런 아이들이 주를 이루는 놀이생태계의 특징은 폭력에 대한 무형적인 문화적 통제장치가 없어서 ‘길잃은 폭력성’이라는 아노미적인 면을 가진다. 폭력에 대한 구성원들의 내적 기준이 매우 헐거워 진다. 아이들끼리 약간 거칠어지는 수준을 넘어 공격성에 고삐가 완전히 풀리면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여 일상적인 폭력과 왕따 등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아이들이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기 전까지 놀이 속에서 벗들과 울고 웃고 생기를 발산하도록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고민은 지금 우리가 걷은 이 골목에서 풀어야 한다. 지금 중요한 작업은 셋이다. 먼저 비용이 계속 발생하거나 기업에 이익을 가져주는 놀이는 배제하고, 사람과 공간과 간단한 놀잇감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놀이를 찾아서 정리하는 작업이다. 두 번째로 성인들에게 계속 의존해야 하는 놀이는 뒤로 미루고, 아이들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영역 속에서 다양한 놀이가 전승되고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세 번째로 다양하고 균형있는 놀이들이 세대를 이어 전수되도록 노력하고 공동체인 동시에 쟝글인 놀이 생태계의 형성과 지속을 직업으로 삼는 플레이리더가 있어야 한다. 이들 성인 플레이리더들의 역할이나 개입은 다양한 놀이를 고학년에게 균형있게 소개하는 정도가 적절하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리더라는 직업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주체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하는 작업이 고학년에게 성공적으로 안착되면 전조작기에서 조작기로 넘어가는 아이들 즉 6세~8세의 아이들은 형·언니·누나·오빠들과 다양한 놀이를 접하면서 익히게 된다. 놀이생태계를 최적화하는 작업은 아이들을 살리는 일이다. 놀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활동이다.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억압들은 놀이 속에서 풀려 나갈 수 있다. 놀이생태계에도 실제의 생태계처럼 극상과 천이가 일어날 그런 희망이 있을 수 있다.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誌에 ‘동지일양생 하지일음생冬至一陽生 夏至一陰生’이라는 구절이 있다. 동지, 즉 1년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아서 음의 기운이 가장 성한 날에 하나의 양의 기운이 생겨나며, 하지, 즉 1년중 밤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에 음의 기운이 하나 생겨난다는 통찰이며 믿음이다. 자연계와 인간사의 모든 흥망성쇠를 아울러서 딱 10개의 문자로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하다. 21세기가 앞으로 어떤 시대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전자매체의 놀이는 지금과 같이 영원한 극상 상태로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문에 셧다운제 같이 금지를 위주로 하는 방법은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