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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Sep 03. 2018

27. 놀이실조

놀이의 반대는 노동이 아니라 억압이다. The opposite of play is not work. It’s depression. 

– Brian Sutton-Smith, Contemporary American folklorist 


놀이실조play undernourishment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학생들의 행동을 해석해 보았다. 아동의 성장과 발달에 놀이가 필수적인 것이라고 가정하면 놀이의 영양실조가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미국과 영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선행하여 계량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와 조사를 통해 놀이실조라는 증상이 분명 존재한다는 결론 내렸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놀이의 실조는 이상한 발달이나 행동을 야기한다. 놀이를 박탈한 쥐들과 놀이 다형성을 누리고 성장한 쥐들을 대상으로 고양이에 대한 반응을 실험하였더니 놀이를 박탈당한 쥐들은 실제로 고양이가 없지만 그 냄새와 소리 때문에 은신한 곳에서 굶어 죽었다. 그에 반해 놀잇감과 놀이환경과 놀이할 시간을 충분히 누린 쥐들은 탐색을 통해 실제 위험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뒤에 은신처에서 나왔다. 물론 실험 결과를 그대로 인간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현재 아이들은 놀이실조 상태이다. 놀이실조란 말 그대로 다양한 놀이의 조화와 균형을 잃은 상태로써 놀이가 주리라고 기대되는 발달상의 도움과 장점을 충분히 얻지 못한 것을 이른다. 서구의 이론에서는 ‘놀이의 박탈deprivation of play’이라는 술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를 번역할 때 놀이실조라고 한 사례도 있긴 하지만 어린이를 포함한 인간에게 놀이를 완전히 박탈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놀이의 영양실조’상태와 놀이 기회의 축소 및 놀이생태계 내의 역동적 관계망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문화적·사회적 경험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반응하면서 연습할 맥락의 상실 등으로 생겨나는 증상을 놀이실조라 이른다.  

놀이의 발달적 기능이 아동의 신체·언어·인지·사회 발달의 여러 측면에서 작용할 뿐더러 놀이생태계의 교란요인과 놀이실조가 복합적으로 연계되기 때문에 그 증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비전문가들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 실외 환경에서 몸을 놀려 하는 놀이가 급속도로 사라지면서 아동과 청소년의 신체적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비만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 몸의 상태가 나빠지면 정신적 건강에도 적신호가 들어온다.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늘어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험과 관련하여 불안장애나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과도한 조기교육에 의해 오히려 문해력과 인지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되었다. 이런 현상을 인지적 피로골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정해진 답을 주입받다 보니 정답이 아닌 다른 답들을 숙고하지 못하여 삶의 다양성이 감소하고 획일화 된다.  

놀이 실조의 증거는 매우 많다. 자녀들과 시간을 보낼 여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보육환경에 보낼 여력이 없는 부모들의 아이들은 무력감과 생기 없는 행동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애석하게도 이른바 낙후지역의 학교에 가면 그런 사례를 입증해 주는 학생들이 한 반 마다 몇 명씩 있다. 인간에게 최초로 나타나는 놀이가 양육자와 영아 사이의 애착 형성과정에서 생겨난다. 생계 자체가 늘 위기인 계층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놀이실조 증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어린이들의 놀이생태계를 중심으로 삼는 본서의 범위를 벗어나는 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놀이생태계와 관련된 놀이실조 중 대표적인 사례는 폭력성 또는 공격성과 연관된다. 한국은 자살율이 어느 연령을 막론하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이다. 벌써 수 십년째 수위를 달리기 때문에 약간 둔감하게 받아들이게 되기도 한다. 늘 세계 1·2위를 다투니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면 약간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다.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 자살 통계는 과거에 비해 자살율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몇 십년째 세계 1위인 선수가 계속해서 세계 신기록을 갱신하는 것과 비슷하다. 동물행동학자들은 자살의 이유 중 하나로 공격성의 방향 전환을 들고 있다. 공격성이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결국 본인에게서 배출구를 찾는다. 놀이는 합의된 규칙 속에서 공격성을 발산하게 하여 해소하는 치유적 기능을 가지기에 사람은 생활에서 부득이하게 얻게 되는 부정적 감정을 여러 놀이를 통해 배출하게 된다. 놀이를 완전히 빼앗는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겠지만, 실제로 놀이를 박탈당한 어린이들은 타인이 보기에 그렇게 대단한 이유도 아닌 일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놓아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놀이실조로 짐작되는 가장 충격적일 수 있는 사례를 보자. 


여자아이인 R은 돌이 되기 전부터 유아교실에 다녔다. 그림이나 글자가 인쇄된 카드를 보고 알아맞히는 플래시 카드, 영어로 자장가를 들려주는 카세트테이프, 가구나 가전제품에 붙어 있는 영어나 한자 이름표 등을 가지고 공부를 계속했다. 과목은 점점 늘어났다. 영어회화, 피아노, 발레 등 거의 매일 학원에 갔다. R은 전국유아교실경연대회에서 늘 상위권에 들었다. 그 덕분에 다섯 살이 되자,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거의 모든 한자를 익혔고 어느 정도의 영어회화도 가능해졌다. R은 국립대학 부속 초등학교에 진학했고 중학교는 더욱 어려운 곳을 택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불안감이 점차 심해졌던 것이다. 결국 여동생의 목을 조른 후, 자동차의 앞 유리창을 깨는 난동을 부린 다음,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일화는 《구급정신병동》(노무라 스스무 저)이라는 책에 소개된 실화다. 병원으로 이송된 후, 소녀의 행동은 더욱 끔찍했다. 의사나 부모에게 대들며 쓰는 말투가 도를 지나쳤다. 독설도 마음을 도려내는 듯한 날카로운 말만 골라서 했다. “정신과 같은 거 의대에서 ‘꼴찌’나 하던 것들이 운영하는 거 아닌가?” “너(의사)야말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해. ··· 내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야.” “약한 아이들을 너희가 만든 인조인간처럼 취급하고, 그러다가 망가지면 즉시 정신병원으로 보내지? 지옥 끝까지 가서라도 반성해야 할 사람은 이 망가진 인조인간을 낳고 키운 바로 너희들(부모)이란 말이야. 특히 너는 이 망가진 인조인간과 그 불쌍한 동생을 버리고 가출한 적이 있잖아! 너는 그 점에 대해서 반성은 하고 있어?” ··· 결국 R은 자살하고 말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의사는 왜 그 소녀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 확실히 밝히지 못했다. 다만 그는 소녀가 ‘다 타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후지와라 토모미, 팔없는 사람을 그리는 아이들, 기파랑, 2005. 130~131면.) 


왕따 같은 폭력적인 현상이 유난스레 증가하는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자기 주변의 친구가 저급한 폭력에 무방비로 그것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일인 동시에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전국적으로 문제가 될 만큼 일어나는 지 원인을 제대로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폭력적인 영상물이나 게임에 영향을 받은 아동, 청소년들이 왕따 문제를 일으킨다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손쉽다. 아이들이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일에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참여하도록 한 것은 할리우드나 게임 제작자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놀이생태계는 어린이들의 또래집단이 있는 곳은 어디나 있지만, 현재 앞서 말한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이러한 환경이 무너진 곳에서 자란 어린이들은 무척 복잡한 방식으로 놀이실조 증상을 보이게 된다. 단적으로 현재 10대들이 보이는 매우 ‘안정되고 차분한 혼란’은 그 이전의 세대들이 보이지 않았던 특성이다. 놀이생태계의 교란 이후 개개인이 파편화되고 단자화되어 전반적인 추세나 대세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행동장애와 정서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난다고 한다.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딘가 생활의 실감이 떨어지고 적응에 미숙하거나 실패하는 아이들이 있다. 적응이란 생활의 실감을 가깝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적응미숙은 생활의 실감에서 원근감이 떨어지는 것이며, 적응시늉실패는 생활의 실감에서 일부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고, 적응실패는 생활의 실감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아동의 경우 성인과의 관계보다는 또래집단 내부의 관계 쪽이 생활의 실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또래집단에 섞이는 법을 전혀 체감하지 못하거나 어색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보다 온라인 상에서 더 친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하다. 

놀이의 유용성을 논할 때 가장 앞자리에서 말해지는 것이 바로 ‘적응 능력’이다. 인간의 경우 ‘인간과 놀이의 상호맥락’을 고려하면 된다. 물론 놀이와 적응력의 관계에 대해서는 근대의 학자들이 동물을 관찰하면서 주요한 정향을 발표했다. 상당수의 육상 동물의 놀이에서 뜀박질은 주요한 놀이 형태다. 특히나 육식동물과 중형 초식동물의 경우 놀이의 대부분이 쫓고 쫓기는 추적과 도망으로 이루어진다. 육식동물의 경우는 거기에 더해 레슬링을 하듯 둘이서 서로 덮치고 공격하는 시늉을 한다. 조류의 경우 비행기술을 연마하는 듯한 놀이를 즐긴다. 아주 작은 동물들의 경우 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또한 즐긴다. 동물들의 이런 놀이를 해석할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놀이들이 그 동물들의 생존과 적응을 위한 능력을 훈련시키고 향상시키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들은 적응을 위해 놀이를 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우리 인간도 역시 고등동물이니 놀이와 적응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물원이나 실험실에 갇혀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야생 상태에서 보여주지 않는 비정상적이고 특이한 증상을 보여준다. 앞뒤로 오가거나 머리를 흔들거나 창살을 물어뜯는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이 증상을 상동증常同症이라고 하는데 뇌 발달 장애나 학습 및 고통 감지 능력의 장애 등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동증을 없애기 위해 여럿이 어울리게 하거나 혼자서라도 놀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인간 역시 동물이므로 놀이라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 과도하게 억제될 때 상동증과 비슷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 역시 놀이실조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생기生氣의 억제와 다양성의 감소’를 들 수 있다. 

놀이를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놀이실조 세대들이 보이는 심드렁하고 무덤덤한 모습을 일정 이해할 수 있다. 놀이실조 세대가 성장하는 일상은 자극과잉과 자극과소가 반복되고 중첩되는 현대인의 일상이다. 갈수록 화려해지는 대화면의 영상물과 게임은 과다한 자극이 된다. 영화관에 가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고 나올 때 머리가 띵한 것은 영상 속의 여러 정보가 뇌에 자극과잉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소자극의 상황에서 항상 무엇인가를 하려는 충동은 매우 자연스럽다. 학교 현장의 상당수 학생들은 이미 학습지나 학원의 선행학습을 통해 전반적인 내용을 체험했다. 한 번 체험한 내용이기게 학교 수업은 ‘흘러간 옛노래 듣기’ 같은 과소자극이 된다. 반대로 교과 학습을 조기에 포기한 학생들에게도 수업 중 교사가 전달하는 내용은 아무런 자극이 되지 못한다. 이들에게도 학교는 자극과소가 된다. 자극과소의 상황에서는 뭔가를 하려는 충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러한 충동은 놀이의 기초가 되어 놀이 활동을 이끌어 낸다. 놀이충동이 행동으로 나오는 걸 완전히 막을 순 없다. 그런데 요즘 한 교실에 그런 학생이 보통 삼분지 일이 넘어가게 되면서 학교 현장에서는 보통 교실붕괴라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똑같은 가지 위에 똑같은 색깔을 발라 바퀴벌레에게 내밀면 점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바퀴벌레보다 몇 백배(?) 영민한 인간 어린이는 더 빨리 더 쉽게 호기심을 잃는다. 과소자극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 개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도 심하게 자명하다. 그 개념을 이해하고 교훈을 얻어도 실제로 활용하는 데 어려운 문제가 놓여 있다. 자녀 한 명 당 일년에 이삼백 만원 정도의 사교육비를 들여 과소자극을 제공하는 것은 재테크의 관점에서 보아 합리적이지도 않고 현명하지 않다. 

전자매체의 놀이가 중독성이 강하다는 표현을 요즘은 과몰입이라고 하는데 이 과몰입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게임을 장시간 즐긴 후에 일상의 실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여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덤덤하고 심드렁한 것이 쉬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상태가 장기화하면 매사에 무기력하여 심신이 건강할 수 있는 활동 자체를 멀리하기 쉽게 된다. 히키코모리라는 새로운 현상은 전자매체가 없던 시절에 생겨나지 않았을 듯 하다. 전자매체 덕분에 방 밖으로 나갈 일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자매체가 원인이 되어 히키코모리가 생겼다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 두 가지 사이에 인과관계를 단선으로 그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두 가지가 우연히 병행해서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놀이실조는 두 가지 사이의 관계를 현재로서 가장 잘 설명한다. 이런 논의는 결론을 내리기 무척 위험하므로 좀더 면밀히 그리고 두루두루 살피고 성찰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계급이나 성별이나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놀이생태계는 다양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한 시대와 문화의 산물일 수 있는 측면을 무조건 놀이결핍play deficits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놀이차이 가설이라고 하여 인간의 능력은 본질적으로 인종이나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는 없지만 놀이생태계의 특성에 따라 선호되는 놀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는 이론이 있다. 이 가설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21세기를 살아갈 현재 어린이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닌텐도와 휴대폰과 컴퓨터를 끼고서 게임과 여러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서핑에 과몰입하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용인하게 된다. 이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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