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비타민을 필요로 하듯 즐거움을 필요로 한다. Human beings need pleasure the way they need vitamins.
인간은 폭력적인가? 일상을 돌아보건 역사를 살펴보건 인간에게 폭력성이나 공격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른 생명체를 먹이 삼아야 하고, 짝짓기를 위해 다른 개체와 경쟁을 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동물들이 공격과 폭력성이 없을 수 없다. 현재 지구의 먹이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참고로 프랑스 드 발이라는 영장류 동물행동학자는 인간은 폭력적인 존재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을 주었다. “인간이란 폭력과 평화의 양가성 모순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기에 그 중 하나로는 해명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런 속성이 놀이 일반을 매개로 증폭될 것인가, 반대로 해소될 것인가? 정신분석학의 비조인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놀이를 통해 폭력성이 해소된다”고 하였지만 인간과 놀이 같은 복잡한 체계에서 그런 단선적인 일반론 자체가 성립이 될 지는 의문이다. 놀이 중에는 경쟁을 주된 요소로 갖는 것이 특히 많다. 경쟁을 주요소로 가지는 놀이 중에서도 대근육을 주로 사용하면서 팀 대 팀으로 경쟁하는 놀이는 놀이자들의 폭력성과 공격성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이 놀이 중에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놀이가 분명 존재하며 많이 존재한다. 그런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놀이로 인해 폭력성이나 공격성이 해소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증폭될 것인가?
실증적인 연구와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이런 문제는 실험 결과가 직접 말하기 보다는 해석하기 나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관건은 사회가 폭력성을 얼마만큼 허용하는가 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본 21세기 소년들은 그저 흥미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20세기에 고등학교를 다닌 세대라면 이런 영화가 얼마나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지 안다. 같은 한국인이고 같은 나이대의 청소년이지만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전혀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일이 십년 사이에 물리적 폭력과 공격성을 허용하는 정도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지금의 놀이생태계를 관찰하면 물리적 폭력보다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등의 관계적 폭력이 기승을 부린다. 현대의 대표적인 놀잇감인 컴퓨터와 휴대폰은 이런 관계적 폭력을 억제하는지 아니면 많은 어른들이 우려하는데로 촉진하는지 알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며 놀이의 종류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터이다.
놀이에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아이나 어른이나 스트레스 혹은 마음에 맺힌 것이 생겨날 때 놀이의 카타르시스는 이를 풀어내는 권능이다. 한국어에서 놀이와 노래가 어원이 같은 점이나, 영어에서 놀이와 연주하다, 운동하다의 어휘 자체가 같은 점은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사람이 휴식과 놀이 없이 살 수는 없다. 놀이생태계가 교란되면서 어린이들의 정신건강이 심하게 위태로워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놀이의 푸는 힘을 의학에서 활용하면 ‘놀이치료’가 된다. 그러나 치료보다는 ‘예방’이 상책이다. 현재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을 그저 병원과 의사를 늘리고 약을 더 먹이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좀 전향적으로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아동청소년 문제에 있어서 통념보다 많은 답이 놀이에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문제를 적시한다면 적어도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