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편에 있는 보드방, 그곳에서 아들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들과 방콕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한낮의 더위를 보내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전철역에서 셔틀을 기다릴까 하다 호텔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서울에서도 이 정도는 거뜬히 걸어 다녔으니 말이다.
방콕의 1월 날씨는 한낮 서너시간만 피한다면 걸어다니는 데 그리 무리가 있는 더위는 아니었다. 물론 자동차 매연이 심한 대로변만 아니라면 말이다. 시원한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걷기를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걸어봄직하다고 생각된다. 어디든 걷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과 마주치게 되는 행운도 있으니 말이다.
호텔로 돌아가는 대로변은 퇴근길 자동차 매연 때문에 걷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대로변 대신 골목길을 선택했다.
퇴근 시간 무렵 방콕 시내 골목길은 퇴근을 서두르거나 저녁 식사나 술 한잔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호텔 주변이 다국적 기업과 대사관이 많은 동네인지라 태국 식당뿐만 아니라 멕시코, 스페인, 일본, 프랑스 등 다양한 세계 각지의 식당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는 골목길 탐험길에서 저녁을 먹을 만한 식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식당과 바가 늘어서 있는 골목길에서 우리는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는 태국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창밖에서 그곳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여기가 뭐하는 곳인가 싶었다. 하지만 곧 아들은 그곳이 보드게임하는 곳인 거 같다고 했다. 한때 서울에도 이런 곳들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한쪽 벽면에는 보드게임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그리고 실내에는 네다섯 개의 큰 테이블이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들은 게임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도착 다음날이고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녀서 피곤할 법도 한데 아들은 근처 멕시코 식당에서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는 그 보드방에 잠깐 들러 보자고 나를 졸라댔다.
'그래, 한번 가 보지 뭐.... 네가 할 만한 게임이 있을지 모르겠다'
반신반의하는 생각으로 들어선 보드방은 밖에서 보기보다 더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직원은 낯선 외국인의 방문에 조금은 당황하는 듯 했지만 이내 친절하게 게임을 고르는 것을 도와주었고 아들은 용케 이미 해본 적이 있는 게임을 하나 골랐다. 그렇게 우리 둘은 게임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집에서도 자주 보드 게임을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낯선 방콕 골목길에서 이런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와 달리 아들은 전혀 이상한 느낌이 없는 듯했다. 그저 재미난 게임이 즐비하게 쌓여 있는 그 공간이 천국인 것만 같아 보였다. 우리 둘은 새로운 게임을 즐기면서 방콕에서의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 우리 내일 또 가자... 그래도 되지?'
'그래, 안될게 뭐 있냐... 특별히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난 우리는 호텔 주변을 돌아다니며 점심 먹을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어제 갔던 그 보드 방으로 향했다. 보드 방에는 오후나절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손님이 가득차 있었다. 어제와 달리 직원은 이미 너무 바쁜 상태였다. 우리는 그녀가 한가해지기를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지 고민하고 있던 우리에게 옆테이블의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자기 가족과 함께 게임을 하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아들과 나는 그 팀과 함께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가족은 어린 꼬마 조카와 삼촌 그리고 할머니,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자리를 잡고 가만히 살펴보니 할머니는 이미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이셨고 조카는 너무 어려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삼촌은 조카와 어머니를 위해 즐겁게 게임을 진행했고 낯선 외국인까지 함께 팀을 만들어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는 보드게임을 즐기게 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어우러진 국제적 보드게임을 즐기게 되었다.
아들은 낯선 태국 가족과의 행복하고 즐거운 방콕에서의 저녁 시간을 만끽했다.
두 시간 가까이 게임을 즐기다 아쉽게도 우리는 저녁 공연 시간 때문에 보드방을 나와야만 했다.
"엄마 우리 내일 또 가자!!!"

'아들아, 방콕에 보드방만 있는 건 아니란다.....'
아들과의 방콕 여행은 이렇게 말 그대로 '자유'여행이었다.
그냥 아들에게 날것 그대로의 여행지를 보여주고 싶었고 구체화된 여정보다는 그냥 주어진 대로 움직여보고자 했다.
방콕에서 돌아와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이름 모를 골목길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더 머릿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