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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환 Jul 31. 2023

늘어진 넥타이가 되지 않으려면

책은 좋은 도구다

            넥타이는 유럽에서 군인들이 목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수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덕분에 남성을 상징하는 액세서리가 되었다. 넥타이는 얼굴 바로 아래,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어 색이나 무늬, 크기, 두께에 따라 사람의 인상과 분위기를 좌우한다. 이런 이유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넥타이는 중요하다. 특히 넥타이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무적인 이미지가 있어 남성 직장인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얀색 셔츠에 넥타이를 맨 직장인을 넥타이 부대라고 부르는 이유다. 


   20대에 직장을 들어간 남성은 새로 산 넥타이처럼 반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고 좋은 넥타이라도 한 계절 매고 나면 손때 묻고 구겨지고 늘어져서 점차 멀리하게 된다. 어디 넥타이뿐인가. 세월이 흐르면 얼굴도 늘어지고 몸도 늘어진다. 중년을 지나 퇴직을 앞둔 나이가 되면 완전히 늘어진 넥타이 신세다. 박성우 시인은 <넥타이>에서 그런 쓸쓸한 모습을 표현했다.    


       

  늘어지는 혀를 잘라 넥타이를 만들었다

  사내는 초침처럼 초조하게 넥타이를 맸다 말은 삐뚤어지게 해도 넥타이는 똑바로 매라, 사내는 와이셔츠 깃에 둘러맨 넥타이를 조였다 넥타이가 된 사내는 분침처럼 분주하게 출근을 했다

  회의시간에 업무보고를 할 때도 경쟁업체를 물리치고 계약을 성사시킬 때도 넥타이는 빛났다 넥타이는 제법 근사하게 빛나는 넥타이가 되어갔다 심지어 노래방에서 넥타이를 풀었을 때도 넥타이는 단연 빛났다

  넥타이는 점점 늘어졌다 넥타이는 어제보다 더 늘어져 막차를 타고 귀가했다 그냥 말없이 살아 넌 늘어진 혀가 없어, 넥타이는 근엄한 표정으로 차창에 비치는 낯빛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넥타이를 잡고 매달리던 아이들은 넥타이처럼 반듯하게 자라주었다    

  귀가한 넥타이는 이제 한낱 넥타이에 불과하므로 가족들은 늘어진 넥타이 따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넥타이>, 박성우     

 


    남성은 퇴직하든 은퇴하든 돈벌이가 안 되면 가족에게 늘어진 넥타이처럼 관심 밖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시리다. 한때 빛나던 당신이 이제 수많은 시간을 그저 늘어진 넥타이처럼 꼬질꼬질하게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한참을 양보하여 그래도 나이 들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아직 젊은데 벌써 늘어진 넥타이 같은 존재라면 문제 아니겠는가.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된 아버지를 이성복 시인은 <꽃 피는 아버지>에서‘벌레’로 취급하였다.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기 며칠 전부터 벌레가 나와 책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처음엔    두 군데, 다음엔 다섯 군데 쬐그만 홈을 파고 고운 톱밥 같은 것을 쏟아냈다 저도 먹    어야 살지, 청소할 때마다 마른 걸레로 훔쳐냈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계셨다 텔레비전 앞에서 프로가 끝날 때까지 담배만 피우셨다. (중략) 

  구멍마다 접착제로 틀어 막았다 (중략) 이버지는 낮잠을 주무시다 지겨우면 하릴없이,    자전거를 타고 수색(水色)에 다녀오시고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중략) 

  또 한 주일이 지나고 나는 보았다 전에 구멍 뚫린 나무 뒤편으로 새 구멍이 여러 개    뚫리고 노오란 나무 가루가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었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노오랗게    묻어났다 숟가락을 지우며 어머니가 말했다 창틀에 문턱에 식탁에까지 구멍이…… 약    이 없다는데, 

  아버지는 밥을, 소처럼, 오래오래 씹고 계셨다

                                                                                      <꽃피는 아버지일부이성복     



    은퇴한 아버지가 벌레라니. ‘접착제로 구멍을 틀어 막’아도 끊임없이 구멍을 내며 노란 가루를 쌓아 놓는 위협적이고 귀찮은 존재라니, 차라리 ‘늘어진 넥타이’가 더 긍정적이다. 이성복 시인의 개인사와 연관 있는지 상상력으로 지어낸 것인지 모르지만, 화자는 단순히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벌레로 취급하지 않았다. 화자의 아버지는 정년퇴직이 아니니 젊은 나이에 회사를 그만둔 모양이다. 그만둔 후에 새로운 직장을 찾는 노력은커녕 ‘집에만 계시’고, ‘테레비 앞에서 프로가 끝날 때까지 담배만 피우’시고, ‘낮잠을 주무시다 지겨우면 하릴없이, 자전거를 타’는 게으른 모습이 화자를 자극했을 것이다.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아버지를 벌레 같은 존재로 표현한 것이다.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느니,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 아비를 어떻게 벌레 취급을 하느냐 같은 꼰대 같은 생각은 잠깐 내려놓자. 벌레 같은 존재나 늘어진 넥타이가 되지 않는 방법에 집중해 보자. 



    공자 제자 중에 자로(子路)가 있다. 자로는 성격이 거칠고 용맹하여 힘쓰는 것을 좋아하며 의지가 강했다. 수탉 꼬리로 만든 모자를 쓰고, 수퇘지 가죽으로 장식한 검을 차고 다녔다. 힘만 믿고 공자를 업신여기기도 했다. 공자가 예의로 대하며 천천히 자로를 이끌자 자로는 후에 유자의 옷을 입고 스승에게 드릴 예물을 들고 문인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자로를 처음 만났을 때 공자가 물었다.

 “자네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저는 긴 칼을 좋아합니다.” 

  자로가 대답하자 공자가 말했다.

  “내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네. 자네는 자네가 아는 것만 가지고 말하는데, 거기에 배움을 더하면 감히 누가 자네를 따라올 수 있겠느냐?”

  “배운다고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자로가 물었다.

 “임금이라 해도 간언해 주는 신하가 없으면 올바르지 못하게 되고, 선비도 함께 배우고 서로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배운 것을 잃게 된다. 길들지 않은 말을 다루려면 손에서 채찍을 놓을 수가 없고, 활을 쏘려면 활 조종간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무가 먹줄을 따라야 반듯해지듯이 사람도 조언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반듯해지는 법이다. 학문에는 묻는 것이 중요한데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느냐? 만약 어진 사람을 해치고 선비를 미워한다면 틀림없이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군자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가 길게 대답했다. 그러자 자로가 또 물었다.

  “남산에 소나무는 잡아주지 않아도 반듯하게 자라고 그것을 잘라서 화살을 쏘면 물소의 가죽도 뚫을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꼭 학문이 필요하겠는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화살에 깃을 꽂고 앞쪽에 촉을 갈아서 박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깊이 박히겠느냐?” 

  결국 자로가 수긍하며 대답했다. “공경하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공부, ‘늘어진 넥타이를 피하는 방법 

   ‘화살에 깃을 꽂고 앞쪽에 촉을 갈아서 박는’ 일은 늘어진 넥타이를 다시 반듯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공자는 자기 계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힘만 믿고 공자를 업신여기던 사람이 학문하는 유학자로 변신한다. 자로는 정치가로 활동했다. 공자는 자로를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공자는 자로가 제자가 되고 난 후부터 노나라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공자가 자로와 같은 시정잡배 출신도 가르치고 배우는 데 힘쓰면 훌륭한 선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한때 자신을 업신여기고 폭행까지 하려 한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여 훌륭한 정치가로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르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했다. 또한 한때 험악한 생활을 했던 자로는 열심히 배우고 실천하면 시정잡배도 훌륭한 학자나 정치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다산 정약용도 아들과 제자들에게 공부를 강조했다. 다산 스스로 복사뼈가 세 번 구멍이 나고 벼루가 여러 개 밑창 나도록 노력한 사람이다. 과거를 볼 수 없는 중인 신분으로 다산의 제자가 된 황상(黃裳)과 관련해서는 사제 간 애틋한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다산은 1801년 음력 11월 강진현에 유배 와서 동문 밖 주모의 호의로 한겨울을 잘 지냈다. 유배 온 이듬해인 1802년 초가을부터 읍내 아전 자식들 몇 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제자가 황상이다. 황상이 다산에게 물었다.

 “저는 세 가지 흠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둔하고요, 둘째는 꽉 막혀있고요, 셋째는 답답함입니다. 저 같은 애들도 공부를 잘할 수 있겠습니까?”


  다산이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흠이 있다. 첫째는 외우는 일에만 힘쓰기 마련이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둘째는 문제의 핵심은 잘 알아서 글을 잘 지을지는 모르나 진중함이 없고, 셋째는 깨닫고 푸는 일에만 빠를 뿐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너는 그것이 없구나. 무디어도 뚫고자 하면 그 구멍은 넓고 커진다. 막혔다가 커진다. 막혔다가 통하게 되면 그 흐름이 빠르게 되고, 어긋나도 문지르다 보면 그 빛이 윤기가 난다.” 

  그러면서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하며 삼근계(三根戒)를 가르쳤다. 이후 황상은 다산의 가르침 속에서 학문적 진전을 이루며 기대에 부응했다. 황상은 15살 때 매일 시 한 편씩 쓰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일흔이 넘어서도 지켰다.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일화는 황상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는 8년여 동안 제주도에 유배 생활을 했다. 제주도에서 황상이 쓴 시를 보고 크게 감탄한 김정희는 유배가 풀리자마자 가장 먼저 강진에 있는 황상을 만나러 갔다. 신분제가 엄격한 조선 시대에 사대부가 중인의 시를 보고 감탄하여 직접 만나러 간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김정희가 다산의 아들 정학연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제주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시 한 수를 보여주었는데, 묻지 않고도 다산의 제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름을 물었더니 역시 황상이었다.’     


    나이 들었다고, 은퇴하였다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정신과 몸을 늘어진 상태로 두며 안된다. 그렇다고 ‘분침처럼 분주’ 필요는 없지만 ‘텔레비전 앞에서 프로가 끝날 때까지 담배만 피우’거나 ‘낮잠’만 자는 게으른 모습은 스스로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가 되는 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자의 제자 자로나 소진은 공부하여 넥타이를 반듯하게 세웠다. 가족에게 벌레 취급을 당하지 않고, 몸과 정신이 넥타이처럼 늘어지지 않는 방법은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방법밖에 없다. 책은 좋은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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