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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환 Aug 11. 2023

내 마음속의 고래 한 마리

마음속에 고래를 키우면 청춘 

                 몇 살부터 몇 살까지가 청년일까? 청년기본법은 19세 이상 34세 이하로 규정한다. 발달심리학에서는 13~23세까지를 청년기라고 부른다. 정부의 청년전용창업자금 지원대상은 39세 이하다. 엘에이치(LH) 한국토지주택공사 주거복지사업 청년입주자격은 대학생, 취업준비생, 만 19세 이상 만 39세 이하 청년층이다. 법령이나 조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20~30대를 일컫는다. 

  내가 아쉽고 후회스러운 시기는 20대와 30대 청년 시절이다. 꿈이 없지는 않았지만 간절하지도 않았고 꼭 이루겠다는 의지도 부족했다. 당연히 허송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40대에 접어들어 독서에 취미를 붙이고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고 대중에게 강의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마음속에 커다란 고래를 키우기 시작했다. 더 늦지 않고 방향을 잡고 산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정호승 시인은 마음속에 고래를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라고 했다.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청년이다. 꿈을 지니고, 꿈이 비록 밤하늘 별처럼 아늑하더라도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오르는 패기가 있다면 노년은 젊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 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고래를 위하여>, 정호승

  

  1921년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 루이스 터먼 박사는 1910년 전후에 태어난 소년소녀 1,500명을 선발해, 무려 80년 동안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성격과 직업, 인생관을 지녔으며, 결혼이나 이혼은 했는지, 얼마나 건강했는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따위를 추적하고 분석했다.

  장기적인 <수명연구 프로젝트>는 후배들이 연구를 이어갔다. 후배 연구자들은 장수에 영향을 끼치는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는데, 크게 분류하면 성실성과 감성 지능이다. 성실한 사람이 장수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근검절약하고 끈기 있는 사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이 가장 오래 살았다. 성실한 사람은 약물, 흡연 따위도 멀리하고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음주 운전도 하지 않으니 장수에 유리하다. 성실한 사람은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근무환경도 더 좋을 확률이 높고, 주변에 성실한 친구들이 많아 오래 살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목표와 계획은 수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연구자들은 1980년대까지 살아 있는 남녀 참가자 720명을 조사했다. 당시 참가자는 대부분이 70세 이상이었다. 참가자들이 여전히 생산성이 높은지, 일할 의욕이 있는지, 일을 완수하는지 연구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시간제든 종일제든 여전히 돈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새로운 배움의 길로 들어서거나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무언가를 배우고 수료증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변화를 위해 일하거나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의욕을 내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연구자들은 노년에 생산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과 쉬엄쉬엄 일하고 공적을 쌓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비교했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그 뒤 20년(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을 살펴보았더니 꾸준히 생산성이 높은 노인들이 태평스러운 노인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이런 생산적인 성향은 연구 참가자들의 사회적 관계나 행복감보다 더 중요했다. 

  결론을 종합해 보면 나이 든 참가자 중에 가장 오래 산 사람들은 가장 행복하거나 가장 느긋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제일 오래 살았다. 생산성이 높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심지어 노년에도 덜 생산적인 동년배들보다 더 즐겁고 건강하며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경향이 있었다.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을 하는 사람들과 특히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이 느긋하고 나태한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했다.

  역경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건강에 해롭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 중요한 단계에 도달한 뒤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 한결같이 열심히 생산적으로 사는 태도는 장수를 위해 꼭 따라야 하는 지침이다. 장수한 사람들은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일찍 죽을까 봐 두려워하거나 힘든 일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마음속에 고래를 키우면 청춘 만년(晩年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은 가슴속에 커다란 고래를 키운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형보다 더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살 까닭이 없었다. 내막을 들여다보자. 

   당시 한나라는 북쪽 흉노족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한무제는 이광리에게 기병 3만을 주어 흉노를 치게 하였다. 이릉에게는 이광리를 위해 보급을 담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이릉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청을 올렸다.

  "신이 거느린 병사들은 용사로서 기이한 재주를 가진 검객입니다. 힘으로는 능히 호랑이를 잡으며 활을 쏘면 명중이니, 바라건대 제가 한 부대를 맡으면 난우산(蘭于山)의 남쪽에 이르러서 선우의 병사를 나뉘게 하여 그들이 전력으로 이사 장군에게 향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흉노의 주의를 끌어 전력을 분산하여 이광리에 대한 압박을 덜어주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하지만 무제는 기병 전력이 부족하다고 난색을 보였다. 

  "장차 다른 사람에게 소속되기를 싫어하는가? 나는 군사를 많이 발동하여, 너에게 줄 기병이 없다."

  그러자 이릉은 기병 쓸 일은 없고, 적은 숫자로 많은 숫자를 격파하고자 하며, 보병 5천여 명이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무제는 참 장하다고 여기며 허락하였다. 이릉은 보병 5천여 명을 이끌고 30일 동안 북쪽으로 나아가, 준계산에 머물러 군영을 만들고 근처의 지도를 그렸다. 휘하의 기병인 진보락(陳步樂)을 한무제에게 파견하여 전과를 보고했고, 무제는 기뻐하면서 진보락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릉은 이광리를 돕기 위해 흉노의 시선을 돌리는 데서 끝나야만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릉은 준계산에서 흉노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말았다. 적의 주력부대와 맞닥뜨린 것이다. 

  당시 흉노 전력은 기병이 무려 3만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싸움은 하루에 수십 번씩이나 붙었다. 만신창이가 된 이릉의 군대가 어느 산골짜기로 들어갈 무렵, 흉노 선우는 가만두지 않고 포위하고 돌을 골짜기로 굴려서 수많은 한나라 병사를 죽였다. 피해가 매우 크고, 적이 포위하여 진군도 불가능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밤이 되자 이릉은 편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자신을 따르려는 병사들을 모두 저지하면서 말했다.

  "나를 따르지 마라. 장부가 선우를 잡을 뿐이다.” 즉 혼자서 선우를 어떻게든 잡겠다는 것이다. 그게 될 일도 아니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 별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한참 뒤에 돌아온 이릉은 크게 탄식하면서 소리쳤다.

  "우리는 졌다.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느 군리가 이릉에게 권하였다.

  "장군의 위세는 흉노조차 벌벌 떨게 하였습니다. 단지 천명이 따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임시로 흉노에게 항복한 뒤, 훗날 다시 길을 찾아 한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착야후(浞野侯)도 포로가 되었다가 훗날 도망쳐 오니, 황제께서 따뜻하게 맞아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장군은 어떠하겠습니까."

  이 제안에 이릉은 장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거절하였다. 상황이 좋지 않아 뭉쳐 있으면 모두 죽을 뿐이라, 이릉은 병사를 모두 해산시켜 각자 알아서 잘 숨어 적의 눈을 피하기로 하고, 군사들에게 두 되의 마른 식량과 얼음덩어리 한 조각씩 들고 가게 하고는 다른 곳에서 만나기를 기약했다. 밤중에 병사들을 깨워 작전을 수행하려고 했지만, 북을 두드려도 이미 북은 다 찢어져 울리지 않았다.

  이릉은 10여 명과 함께 말을 타고 탈주했다. 그 뒤를 수천 명이나 되는 흉노 기병이 무시무시하게 질주하여 추격해 왔다. 이릉은 폐하를 뵐 면목이 없다고 말하면서 흉노에 항복하였다. 이때 한나라 군사 5천여 명 중 무사히 빠져나간 사람은 4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8만 기에 달하던 흉노 군대는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니, 이만하면 곤경 중에서도 무서운 활약을 한 것이었다.


  처음 이릉의 패배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투항하기보다는 장렬히 전사했기를 바랐다. 나중에 들으니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하고, 장졸은 모조리 죽었다는 것 아닌가. 한무제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 싸우며 최악의 상황에서 가능한 최고의 성과를 거둔 이릉이지만 상황은 어이없게 전개됐다. 신하들은 한무제의 분노에 편승하여 "때려잡아야 합니다."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하고 각박한 소리만을 했다. 오직 한 명만이 이릉 편을 들었다. 바로 사마천이다. 한무제가 이릉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사마천은 이릉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릉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성스러웠고, 병사들과는 신의를 지켰으며, 항상 분발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서 국가의 위급함에 종사하였는데, 그가 평소에 마음속에 쌓아 놓았던 것이니, 국가의 선비라는 기풍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번 거사에서 한번 불행하였으나,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존한 신하들이 그 단점을 부풀려서 매개하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이릉은 보졸 5천이 못 되는 군사로 수만 명의 군사를 억눌렀으며, 오랑캐는 죽은 자를 구하고 다친 자를 부축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활을 쏠 수 있는 백성을 다 동원하여 함께 아군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는데도 이리저리 싸우면서 1천 리를 돌아오다가, 화살도 다하고 길이 막혔으나 병사들은 빈 활만 당기다가 번득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적과 죽기로 싸우고 사람의 죽을힘을 다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하여도 지나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몸은 비록 함락되어 패하였지만, 그가 꺾어서 패배시킨 일은 족히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마땅히 한에 보답하려고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마천의 옹호 발언은 오히려 한무제의 화를 돋우었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한무제는 되려 사마천이 이광리를 깎아내리고 이릉을 변호한다고 생각했고 홧김에 사형을 내려버렸다. 당시 법률 규정에 따르면 사형은 50만 전으로 대체하거나 궁형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려고 궁형이란 치욕을 선택했다. 사마천에게 [사기] 마무리 작업은 고래였다.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았다면 치욕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천이 품은 고래 덕분에 [사기]는 많은 사람 마음속에 고래를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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