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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Jul 20. 2020

초록바람을 타고 온 행복



어제는 친구와 함께 양평의 강변공원을 걸었다. 

요 근래 몇 가지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중이었는데, 친구의 산책 가자는 제안은 고마운 선물이었다. 

남한강의 잔잔한 물결과 드넓은 습지, 그리고 나무와 풀. 포근해진 날씨와 파란 하늘은 덤이었다. 

살 것 같았다. 

뜨끈했던 머리가 한결 시원해졌다.


나의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내 마음에는 초록 바람이 불어온다. 키 큰 나무와 푸르른 들판, 아름다운 빛깔의 들꽃 사이를 거닐고 있는 풍경. 내가 사랑하는 순간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좋다'라는 말이 저절로 울린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랐고, 대학 졸업하고 잠깐 도시에서 일하다 충청도 어느 농촌으로 귀농까지 감행한 나의 이력에 딱 어울리는 감성이다. 자연을 좋아하는 취향으로 지금 경기도 양평 작은 시골에 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최근에 갔던 제주여행에서 가장 큰 감흥은 한겨울 육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초록이 가득했던 자연환경이었다. 가장 추운 1월이 이렇게 푸르다니! 동백 숲의 초록 잎과 붉은 꽃은 나에게 기쁨을 주었고, 푸르른 삼나무와 애써 가꾸지 않아도 길가에 피어있는 들꽃은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작년 한 해 워킹맘으로 일을 시작해서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어린 아들딸과 한바탕 비비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는데, 제주의 거대한 초록 물결 속에 충분히 뛰었고 충분히 놀았다. 참 좋았다. 





돌아보니 초록이 서글펐던 시절도 있었다.  스무 살 무렵의 어느 봄, 하나둘 피어나는 들꽃의 향연에 기쁘면서도 마음 한 켠이 시렸다. 꽃들이 가득 피어있는 상태 그대로를 전부 가지고 싶었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감각의 한계가 슬펐고, 찬란하게 피었다 결국 지고 마는 꽃이 안타까웠다. 꽃을 한 아름 꺾어와 화병에 가득 꽂아도, 사진기 셔터를 무수히 눌러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더 옛날로 들어가 본다. 열 살 조금 넘었을 때였나, 친구들과 광주리 하나씩 들고 동네  뒷동산으로 가서 쑥을 캤다. 등으로 따뜻한 봄 햇살 한가득 맞으며 쑥을 캐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달콤한 나른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한 무더기의 쑥을 만나 충분히 캤으면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데, 나는 다 못 캔 쑥이 너무나 아쉬워 갑자기 마음이 서글퍼졌다. 광주리에 쑥은 점점 차 가는데 다 가지고 싶고 더 가지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마흔 가까이 살아오며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함을 알아버렸다. 만 평의 땅을 사서 수만 개의 꽃씨를 뿌리고 들꽃 범벅의 꽃밭을 가져도 그것이 온전히 내 소유일 순 없다는 걸 자연의 순리로 배웠다.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결국 몸뚱어리 하나 묻힐 정도의 땅만 남는다는 톨스토이의 단편을 떠올리며, 좋으면서 좋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본다. 

다 가지기 위해 뛰고 싶지 않다. 모든 꽃을 눈에 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긴 싫다. 반드시 산꼭대기까지 정복할 필요는 없다. 바쁘게 움직이고 쉼 없이 걷고 빠르게 뛰다가 행복할 순간을 놓치긴 싫다. 
긴 숨 들이쉬고 내쉬며 지금의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는 것. 그러다 만난 작은 돌멩이, 앙증맞은 꽃 한 송이, 초록 풀 하나,  푸른 나무의 시원함에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 그런 삶이 좋다. 
굳이 핸드폰 꺼내 인증하지 않아도 괜찮은 산책길이고 싶다. 그 순간 행복하면 된 거다. 행복의 감정을 지속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소유보다 존재다






사실 오늘도 나는 흔들렸다. 선택한 일 가운데 단 하나가 틀어졌을 뿐이데 속이 쓰렸다. 좋은 조건들을 모조리  다 가지고 싶었다. 꽃밭을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꽃이 피었다 시들고 다시 열매 맺는 과정을 놓치고 만개한 순간만을 유지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종일 마음앓이를 하다가 겨우 고개를 저으며 홀로 피어있는 작은 들꽃 한 송이를 떠올렸다. 너른 들판 다 가져야 행복하다는 생각을 살짝 내려놓고, 산책길 만난 들꽃 한 송이의 행복에 마음을 포개 보았다.

다시금 감사함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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