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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26. 2020
5년 간의 자발적 가난 실험기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지는 '지금'
쌀이 떨어져 사야겠다 할 무렵 쌀이 도착했습니다.
홍성 풀무학교 후원회에서 1년에 한 번 보내주시는 선물, 쌀비누가 떨어져 갈 즈음 지인이 만든 비누를 선물 받았고, 그 비누 다 쓰니 행사 이벤트로 새 비누가 손에 쥐어졌습니다.
첫째 아이 점퍼를 하나 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친구가 자기 아들 옷 한 박스 챙겨놨다며 택배로 보내줬고 아이 입기에 딱 좋을 점퍼가 두 개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절묘한 타이밍.
돈을 안 벌 때 채워지던 '작은 기적'들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계속됩니다.
대학 졸업 후부터 교사일에, 귀농에, 농사에, 다양한 경험을 하며 부단히 달려온 긴 길을 잠시 쉬어가고 싶었어요. 33살, 발도르프학교를 그만두자마자 아기가 찾아왔지요. 바랬던 쉼이었고 기다렸던 아기였기에 무척 기뻤습니다.
하지만 미인가 대안학교에서 받았던 얼마 안 되던 급여마저 사라지니, 나보다 쪼끔 더 받던 남편의 월급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이 딱 부딪혔습니다.
자발적 가난...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살아보자' 하며 지낸 시간이 2013년 8월부터 제가 다시 일 시작하기 직전인 2019년 2월까지니까, 총 5년 7개월이었습니다.
중간에 남편이 안식년 겸 개인작업을 한다고 1년 정도 일을 쉬었으니 12개월은 수입 아예 없이 모아둔 돈으로만 살기도 했네요. (성장을 위해 쉬라고 내가 먼저 권했고, 전재산 계산해보니 1년 치 살아갈 최소한의 생활비는 나오겠다 싶어 안식년을 결정했답니다.)
쉽지 않은 경제 상황으로 어떻게 5년이 넘는 시간을 지내왔을까요? 그것도 아이 둘 낳고 키우면서요.
신기하게도 살아졌어요. 그것도 '자알~' 살아왔습니다.^^
-책도 보고 싶은 거 다 보고(주로 도서관 활용),
-모임도 빠짐없이 가고(부모교육 심리 모임을 만 5년 동안 다녔고, 동종요법 모임에, 한살림모임까지 바쁘게도 다녔음),
-차도 굴리고(처음에는 한 대였다가, 시골생활에 차를 포기하니 삶의 질이 떨어져 나중에는 두 대 굴림),
-여행도 가고(태국, 세부+보홀, 보라카이... 이렇게 다녀왔음. 두 번이나 제주 한달살이 여행 갔음. 쥐꼬리 월급을 쪼끔 더 잘라 저축도 하고, 자녀장려금과 근로장려금 같은 목돈도 활용했음.),
-아이들 발도르프 어린이집도 보내고(가계에선 제일 부담이 되었던 어린이집 특활비! 그렇다고 엄청 비싼 건 아니고 일반 유치원 수준의 금액이었음. 가치소비를 지향해서 무조건 손가락만 빨진 않았다는!),
-육아용품 모자란 것 없이 지냈고(주변에서 물려받은 것만 해도, 챙겨주는 것만 해도 넘쳤음),
-돈이 가장 많이 드는 식료품비도 아껴가며 건강한 식단으로 먹었고(친정에서 보내주시는 양념들과 계절과일과 채소들 열심히 먹었고, 있는 재료 최대한 활용하며 냉장고 파먹었고, 마트에서 합리적으로 소비를 했으며, 외식은 주말에 한 번은 꼭 하고 나머지는 전부 집밥으로, 커피는 집에서 원두 내려 마시기),
-옷도 계절에 맞게 잘 입고, 마당있는 집에서 따습게 지냈고,
-가족들 경조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의를 표시하며...
그렇게 지냈습니다.
쉬운 날은 아니었습니다.
꾸준히 가계부 기록하며 적어도 빚은 안 지면서 수지를 맞추려 애썼고, 마트 가서도 늘 가격표 보며 과소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가끔 마음으로 쪼들린다는 느낌이 들 때면 '적고 벌고 많이 누리자'는 가치관이고 뭣이고 다 내려놓고, 과거의 선택과 곁에 있는 이를 격하게 원망하기도 했지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지금 이렇게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하면서도 쉽지 않은 나날이었다고 내 온몸의 세포들이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말이지요,
'감사'라는 감정은 돈이 풍족하거나 물건이 넘칠 때가 아닌, 모자라고 부족한 가운데, 때를 따라 채워지는 기적을 타고 찾아왔습니다.
무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 어느 순간 그것이 곁에 와 있었어요. 물건이든, 사람이든, 마음이든...
제가 '시크릿'(끌어당김의 법칙)이 강한 사람인가 반문해보기도 했지만, 풍요로웠다면 못 느꼈을 그 '행복'이, 부족하니 선명하고 명확하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섬세한 마음'
그래서 또 살아갈 만했고, 어려운 경제상황에서도 마음만은 넘치게 지낼 수 있었어요. 벗들과 함께요.
자본주의의 화폐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지만
우리의 실험은 사람과 세상을 연결한다.
'돈의 맛'이란 이런 것이다.
화폐의 양적 증식이 아니라
연결망의 강/밀도가 성공의 척도다.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_고미숙_21쪽
작은 것들에 대해, 섬세해진 촉수는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감지해냅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그것을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딱 필요한 때에, 책이든 영상이든 사람이든 그것과 관련된 인연이 주어졌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글감으로 글을 쓰고 싶어 끄적이기 시작했는데, 오늘 도착한 고미숙 선생님의 신간에서 위의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너를 지지해, 샨티"라고 저를 둘러싼 따뜻한 기운이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허투루 보낸 시간은 없습니다.
5년 7개월의 기간 동안 제가 익힌 것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세밀한 감사함과, 100만 원 초반의 생활비로 4인 가구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가계 운영능력과, 온갖 공적 지원과 사회복지적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수집력이었습니다.
다시 저의 경제활동을 시작하며 달라진 점은 커피 마시고 싶을 때 내 돈 주고 카페 가서 마실 수 있다는 것과 빵 먹고 싶을 때 가격 계산 안 하고 충분히 바구니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 또 주 1회 하던 외식을 주 2~3회 정도 한다는 것. 이 정도입니다. (먹을 것 투성이네요ㅋㅋ)
조금 덜 먹거나 조금 더 먹거나. 돈이 주는 위로는 이 정도 수준이긴 합니다. (물론 내 돈 내가 버니 좋긴 해요! 이젠 '자발적 가난'보다 '자립하며, 길 위에 설 노잣돈 마련하자'라는 모토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정 소비를 하며 이미 충분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삶이 선물하는 '일용할 양식'을 쭉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컵이 필요할 즈음 어느 단체 자료집에 글 써줬다고 받은 머그컵! 기적은 이어집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