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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May 24. 2016

바나나, 막걸리의 본질을 묻다.

바나나 막걸리(?)를 둘러싼 막걸리 순수성 논쟁

요즈음 입장이 난처하다. 막걸리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바나나 맛 술 때문이다. 이 술을 개발한 연구소의 책임자는 친한 선배이다. 그리고 바나나 맛 술이 막걸리로 불리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정부 관계자 역시 친한 선후배들이다.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괜스레 논쟁에 끼었다가는 얻는 것 없이 감정의 골만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그러지 못하는 이 오지랖... 나도 싫다.


막걸리 논쟁,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업에서 바나나 맛 마케팅에 편승하여 바나나향을 첨가한 막걸리를 개발한다. 바나나가 아니라 바나나향을 첨가한 것이다. 대박을 친다. 출시 한 달 만에 백만병을 넘겼다.
둘째, 바나나 향을 첨가한 술은 "막걸리"라 불리지 못하고 "기타주류"로 분류된다. 소비자들은 그냥 바나나 맛이 나는 막걸리로 인식한다. 어쨌든 대박을 친다. 바나나맛이 대세 아닌가.
셋째, 기업은 막걸리란 정체성과 주세 감면을 위해 '막걸리'란 명칭을 사용하고 싶어 한다. 막걸리는 전통주 진흥 정책에 따라 5%의 주세만 무는 반면에, 기타주류는 30%의 주세(교육세 별도)를 물어야 한다. 제조원가는 거의 같은 반면에, 막걸리가 1,200원, 바나나 맛술이 1,700원 하는 이유다.
넷째, 전통주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나나 막걸리"를 반대한다. 논쟁은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바나나 우유는 되는 데 왜 바나나 막걸리는 안되는가?"


왜 같은 술인데 소비자는 더 비싼 돈을 내고 마셔야 하나? 전통주 육성을 위한 타당한 규제인가, 소비자의 편익을 축소하고 기업의 기술 혁신을 방해하는 규제인가? 이 논쟁은 공중파에서까지 관심을 가지는 문제가 되었다.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향을 포함한 다양한 소재를 허용해야 한다.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주장이다. 나 역시 소비자들의 선택과 권리를 제약하는 규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할인점 매대에 놓여 있는 바나나 맛 술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부터는 반대하는 측의 입장이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국세청 주류연구소의 조호철 박사이다. 내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전통주 전문가의 말이다.


중국 백주에 카프로**** 성분을 넣게 해준다면 누가 엄청난 노력과 3~4년이나 소요되는 전통방식으로 만들겠나? 알코올에 이 성분 한 방울만 넣으면 고량주 향이 되는데, 그랬다면 세월이 지난 후 백주는 그냥 잡주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술이 되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향을 섞은 막걸리가 유통된다면 굳이 힘들여 좋은 원료로 정성스럽게 발효해서 깊은 풍미와 향을 가지는 막걸리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만들더라도 소비자들이 찾을까. 손쉽게 막걸리를 만들 수 있는데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시간이 지난 후에는 막걸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라는 주장이다. 이 의견에 마음이 움직이는가?


스코틀랜드 위스키 법령에 따른 규정을 한번 살펴보자.

스카치위스키는 맥아로부터 생성된 효소만으로 당화 시켜야 하고 오직 효모 첨가에 의해서만 발효되어야 하고 증류 후 알코올 도수가 94.8% 이하로 하여 사용한 원료의 고유 향미를 끌어내야 하며 반드시 세무서에서 인정하는 숙성 창고에서 오크통 크기 700L 이하, 3년 이상 숙성시켜야 하며 색을 맞추기 위한 식용색소, 캐러멜 이외의 어떠한 물질도 첨가할 수 없으며 스코틀랜드 이외에서 생산을 금지하고 수출되는 모든 스카치위스키는 알코올 도수 40% 이상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전통주 - 테킬라, 위스키, 코냑, 사케, 황주, 럼 등 -는 국가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유명한 전통주에 향료와 색소를 섞어서 판매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다 그런 이유에서다.


이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와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역시 조호철 박사의 말이다.

글리세롤은 와인 발효과정에서 생성되는 부산물인 데 단맛과 바디감, 부드러운 풍미를 제공한다. 특히 귀부 와인 등 스위트 와인에 함량이 높은데, 한 와인 생산자가 글리세롤이 풍부한 와인 맛을 내기 위해 자동차 부동액 성분으로 쓰이는 디에틸렌글리콜을 첨가한 것이 발각되면서 오스트리아 와인은 나락의 길로 떨어진다.


외국의 유명 술들이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나라만의 고유한 특징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AOC(원산지명칭통제) 제도를 통해 포도주의 라벨 표시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그렇지 않고 향료와 색소로 맛을 낸 와인이라면 굳이 프랑스산을 찾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산 와인이 칠레산보다 좋은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사람들은 프랑스가 지켜온 그 전통과 유구한 역사에 대해 기꺼이 가치를 지불한다.


탁주, 약주, 소주에 향료와 색소를 넣게 하고 20년만 지나 봐라! 이 술들은 그냥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뭐 내세울 특징이 있어야 전통주라 주장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이와 같이 막걸리란 명칭의 사용에는 엄격함이 따라야 한다는 조박사의 주장은 우리나라 전통주로서 막걸리의 위상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이다. 반면에 기업의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편익과 수익성이라는 측면을 더 중요시 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 전통주 업체 중 가장 맏형 격인 업체에서 이런 논란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좀 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반면에, 그래 봐야 소주 업체에 비하면 중소기업 수준으로, 그나마 침체된 막걸리 시장을 다시 일으킨 것을 높이 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무관심 보다는 이런 논쟁이 오히려 막걸리 활성화를 위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막걸리 명칭 논쟁은 우리나라도 전통주 강대국들이 거쳐 간 어려운 길을 이제 겨우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이다. 이 논쟁이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따라 우리 막걸리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막걸리 협회(회장 박성기)에서는 막걸리 명칭 사용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토론회를 마련할 것이라고 한다.


막걸리, 소비자의 변하는 기호와 입맛에 충성할 것인가, 아니면 백 년 후에도 남을 전통으로 만들 것인가? 그 갈림길에 서있다.


주세법에 따라 발효 주류 중 탁주, 약주, 청주 등은 "특정주류도매업자"가 기타주류는 "종합주류도매상"이 취급한다. 유통채널이 달라 기존의 막걸리 유통망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게 전통주 제조업체에게는 제약으로 작용한다. 막걸리 명칭을 획득하고자 하는 회사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전통주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진 유통채널에 바나나 막걸리(기타주류)가 들어가는 게 바람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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