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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May 29. 2016

남매들의 벼베기

라오스 몽족 마을의 가을걷이

라오스에서도 10월이면  가을걷이가 시작된다. 산 마을이라고 예외는 없다. 봄철에 씨앗을 뿌렸던 땅에서는 벼가 누렇게 익어간다. 이 시기에 산 위를 바라보면 목가적인 라오스 만의 풍경이 펼쳐진다. 봄철에 산의 나무들이 베어지고, 검게 불에 그을리는 동안에 가졌던 불안감은 가을이 되어 누런 들판을 볼 때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런 가을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피숑에게 졸랐다.


"피숑, 어디 몽족 마을에 한번 갔으면 좋겠는데. 추수하는 장면을 찍고 싶어."


피숑은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사실 오래전부터 계속 졸라 오던 일이었다. 그렇지만 자기는 어느 곳의 풍경이 좋을지 잘 모르니, 사진을 취미로 하는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안될 일 있나. "콜!"


라오스 오지인 싸이솜분주의 화전지역, 밭벼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토요일 새벽,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선크림을 바르고 창이 넓은 모자와 바람이 숭숭 통하는 얇은 쟈켓을 입고, 카메라의 배터리를 점검했다. 6시가 채 되기도 전에 피숑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 밖에 왔으니 나오라고. 밖에는 이미 피숑이 끌고 다니는 하얀색 도요타 픽업 기다리고 있었다.


"음,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피숑"


난 피숑의 차를 타고 <이모네>로 불리는 한인 반찬가게로 갔다. 전날 주문한 김밥을 가져가기 위해서다. 한국인들은 어디에서나 부지런하다. 이 가게 사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들 둘을 라오스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다. 교육열 때문에 라오스까지 온 억척스런 분이다. 나는 가볍게 아침 인사를 하고, 김밥을 받아 다시 차로 돌아왔다. 드디어 먼 길을 떠난다.

 

새벽 길가에는 탁발을 하는 스님들의 행렬이 보였다. 주황색의 천으로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요일마다 각기 다른 길을 돌아 탁발하러 다닌다. 골목마다 스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도 대개 이런 일은 여자의 몫인 모양이다. 아마도 간절한 게 더 많아서일까.


비엔티안 외곽에서 차는 한번 더 멈춘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또 가게에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한 아름 가득 샀다. 우리네 슈퍼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들로, 주로 먹을 것들이다.


차는 렁산(Longxan)을 지나고 사이솜분 주에 들어선다. 이곳이 얼마 전까지는 비엔티안 주였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포비아 금광에서 나오는 거대한 트럭 행렬들을 마주치며 계속 더 깊은 곳으로 달려간다. 2차선 정도 넓이의 도로이고, 군데군데 비포장이다. 그리고 길은 보수가 잘 되지 않아 패여있는 곳이 많았다.


3시간 정도를 달려 어느 한 마을에 멈춰 섰다. 표지판에는 므앙 롱(롱 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도로변에 길 따라 위치한 아주 조그마한 마을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방문할 집 안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둘째 딸에게 찬거리를 좀 사 오도록 시키면서, 피숑이 15만 낍(2만 원 정도)을 건넸다. "이 녀석 통 크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딸은 얼마 후 비개가 잔뜩 붙은 돼지고기를 한 다발을 사 왔다. 그 고기를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어깨에 짊어 메고 드디어 밭으로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전에 피숑은 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작은 돈을 주면서 자동차를 잘 지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애들이 놀면서 차에 흠집을 내지 못하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드디어 출발했다. 햇볕은 뜨거웠다. 잠깐을 아스팔트를 따라 걸었는 데 벌써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참 잘도 걸었다. 한참을 더 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다가 대나무가 우거져 위는 보이지 않는 산 위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았다. 나도 뭐 따라갈만했다. 


경사가 급한 울창한 대나무 숲길을 지나가자 드디어 헐벗은 산이 나타났다. 날은 덥고, 1년 동안이나 운동 않고 놀았던 티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뒤에 쳐져 있던 피숑 아버지와 둘째 딸은 벌써 저만큼 올라갔지만 나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었다. 몇 번을 쉬다가 겨우  산 위에 있는 벼 밭에 도착했다. 이미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쩝~~~


밑에서 볼 때는 한 개의 벼 밭 같지만 사실 한 구역은 여러 사람이 구역을 나누어서 각자 재배한다. 그래서 피숑은 남은 밭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약간은 불안해한다. 밭주인이 싫어한다고.



산 위에는 각자의 구역마다 임시로 만들어진 원두막이 있다. 그곳에 도착하자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저 멀리서 벼를 베고 있던 사람들이 야자잎으로 지붕을 씌운 원두막으로 왔다. 그런데 이런. 모두 애들이다. 중학생, 많아도 고등학생. 이런 나의 기대와는 많이 다른 환경에 조금은 놀랐다.


바로 식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들은 큰 장대 칼로 주변에 있는 바나나 잎을 잘라왔다. 그 위에 돼지고기를 놓고 벼를 베던 낫으로 비개를 잘라내고 갈비를 결 따라서 잘랐다. 이 일은 피숑이 했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고기 손질은 좀 낫나 보다. 하긴 산골에서 돼지고기 손질할 일이 얼마나 될까. 불현듯 가난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같은 몽족이라서 그런지 피숑에게도 그런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자기 어릴 적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게다.


요리는 간단하다. 그냥 검정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솥에 고기를 넣고, (엔진오일) 플라스틱 통에 담긴 물을 붓는다. 그리고 나무를 더 집어넣어 돌 몇 개로 만들어진 화덕에 불을 키운다. 간간히 소금으로 간을 하고, 주변에서 야생 달래를 뽑아와 국물을 내기 위해 같이 넣었다. 매운 고추도 몇 개 넣었다. 준비 끝. 간단한 준비가 끝이 나자 모두 원두막의 평상에 둘러앉는다.



모두들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난 마을에서 먹은 김밥으로 아직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또 산을 오른다고 너무 심하게 진을 뺐는지 식욕이 없었다. 뭐 다들 그렇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비닐봉지에 가득 담긴 찰밥이 나왔고, 삶은 돼지고기가 오늘 메뉴의 전부이다. 아마 이게 없었다면 태국 라면 한봉이 이들의 반찬이었겠다 싶었다. 주변에서는 뜯지 않은 라면 봉지가 보였다.


그들은 너무 잘 먹었다. 찰밥을 손으로 떼고, 또 국물을 그릇에 담아 숟가락으로 먹었다. 여기에서 젓가락은 대개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손을 쓴다. 그 많던 돼지고기가 금세 사라졌다. 이걸 어떻게 다 먹나 우려했지만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냄비의 국물 한 방울까지 사라졌다. 난, 피숑에게 물었다.


"얘들이 이 돼지고기를 좋아해?"


피숑은 대답해했다.  "음, 표정을 보니 정말 맛있는 거 같아." 하긴 지도 잘 먹었으니..... 나도 먹어볼걸 싶었지만, 남은 게 없었다. 소금 간 밖에 되지 않은 돼지고기와 국물, 이들에겐 진수성찬이었겠다 싶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벼를 베기 시작하기 전에 나의 카메라를 위해 포즈를 취해주는 남매들


식사 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봤다. 피숑이 통역을 했다. 일을 하고 있는 4남매 중 2명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외에도 2-3명의 애들이 더 있는 데, 애기이거나 너무 어려서 엄마가 집에서 돌보고 있다. 문제는 엄마도 지병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여기에 같이 못 왔다. 아버지는 돈을 벌러 나갔다. 주로 야생동물이나 물고기를 잡거나, 아니면 산에서 여러 가지 나물을 채취한다. 돈이 생기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한다. 그래야 애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으니. 그래서인지 어느 밭이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애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 한 달에 3만 원 정도면 갈 수 있는데 말이다. 돈은 주로 먹는데 들어간다. 이 근처에는 학교가 없어서 렁산에 있는 중등학교에 가야 하는데 통학이 안되니 기숙사(?)에서 살아야 한다. 근데 뭘 먹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쌀이야 가져간다 해도. 그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간다. 물론 집에 노동력을 보태야 하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이긴 하지만.


나는 애들에게 학교에 가는데 보태라고 약간(?)의 돈을 줬다. 피숑도 애들에게 용돈을 좀 줬다. 이 가족들에게는 무척 큰 돈일 게다. 아마도 이렇게 큰돈을 본 적도 없겠지만, 우리에겐 작은 돈에 불과하다. 과연 우리의 바람처럼 큰 딸과 둘째 딸이 학교를 갔을까?


아래 밭에서 벼를 탈곡하는 엄마와 딸


긴 이야기가 끝이 나자 애들은 다시 일터로 간다. 4남매의 벼베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도 그들의 일터에 함께 동행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산의 기울기는 매우 가팔라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이 산을 슬리퍼를 신고 오르내리며 벼를 베고, 이 벼를 다시 나르고, 타작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벼를 다시 집으로 하나씩 져서 날라야 한다. 그래야 1년이 지나간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작별을 하고 다시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아쉬움이야 남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휴일 날마다 밭일을 하기 싫어서 달아나곤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산을 조금 내려오자 아래쪽에 있는 밭에서는 모녀가 타작을 하고 있었다. 볏단을 나르는 것은 중학생 정도 된 아들의 몫이고 모녀는 나무 막대기 하나로 타작을 한다. 아이 둘은 원두막에서 놀고 있었다. 다시 어린아이에게 과자를 사 먹으라고 용돈을 조금 줬다. 내겐 주전부리 정도의 금액이지만 이 가족이 한 끼 고기반찬을 사 먹을 수 있을게다. 대부분은 한 달 만에 먹어보는 고기 일 게다. 돈의 가치는 서울에서보다 라오스 산골에서 더 큰 가치를 발휘하는 듯했다.



피숑은 걱정을 많이 했다.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마저도 곧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누나들은 곧 시집을 갈 것이고, 집에 남은 노동력은 아들밖에 없는데 어떻게 학교를 다닐 수 있겠냐고 안타까워했다.


애들은 스스로 부모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피숑은 예상했다. 나야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을 계속 받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아직 이 산골 마을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일 게다. 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한세대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때 이들은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때 내가 학교를 계속 다녔으면 어땠을까 하고. 우리 누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산 위에서의 추수,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많은 아픔과 질곡이 있었다. 그들이 살아온 날들과 그들이 살아갈 날들이 보여서 더 가슴 아팠다. 많은 곳에서 추수가 끝이 나가고 있다. 올해는 비교적 풍작이다. 아마도 산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른 영양을 갖춘 밥을 먹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돈을 만들만한 게 자연을 파괴하는 일 말고는 없는데, 그것마저도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점점 더 경쟁이 치열해지는 중이다.




이런 말이 떠 올랐다. 각자 개인은 현재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공유지의 비극"이기도 하고, 아직 지속 가능한 개발의 단계로 가지 못한 라오스 생태계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우여와 곡절은 많겠지만, 그래도 이 풍성한 가을만큼은 이 가족들에게 웃음꽃이 피어나길 소망해본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좀 더 밝게 만들기 위해서 나도 좀 더 분발해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라오스에 파견된 농업전문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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