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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Jun 26. 2016

악과 싸운다고 선은 아니다.

미디어에서 보는 선과 악의 관념들

"악마는 정의로운 사람을 어둠으로 끌어들이는 자이다."


TV 시리즈 CSI에서 보게 된 대사이다. 악당을 상대하는 경찰, 어느 순간엔가 악당마저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다. 그는 여전히 착한 사람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말에도 "욕하면서 닮아 간다"라는 말이 있다. 증오가 가슴에 끓어 넘칠 때 악은 우리 가슴속 깊숙이 자리 잡는다.


이 오래된 이야기 구조는 많은 영화와 게임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영화 <스타워즈>에서 공화국의 팰퍼틴 의장은 무역연합을 사주하여 공화국을 침략하게 한다. 나부 행성이 점령당하고 무역연합이 세를 넓혀가자 공화국은 공포에 휩싸인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 공화주의가 지녀온 가치를 포기하고 전쟁에 대한 모든 권한을 팰퍼틴 의장에게 일임한다. 팰퍼틴은 비밀리에 양성한 클론 군대를 이용해 무역연합을 무찌른 후 공화국을 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등극한다. 하얀 유니폼의 클론 군대는 이후 황제인 다스 시디어스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반란군 편에선 제다이 기사들과 자신을 지지했던 공화주의자들을 무찌르는 첨병이 된다.


히틀러를 불러들인 것도 결국은 독일 국민들의 불안이었다.  마왕 신해철의 '라젠카 세이브어스' 노랫말처럼 "멸망의 공포가 지배"하고 "희망의 날개"가 접히면 사람들은 영웅의 도래를 기다리며 광기에 휩싸인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는 것도 결국은 적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과 스스로에 대한 비하로부터 시작된다. 범죄에 대한 과도한 적개심은 국가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스스로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더 나아가 불안은 집단적인 폭력도 정당화한다. 악에 대항해 싸우다가 결국은 그 자신이 더 큰 악이 되어 간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전쟁과 테러 역시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유명한  RPG 게임인 '파이널 판타지 X (Final Fantasy X)'의 스토리 라인 역시 같은 이야기 구조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인 티더와 유우나가 함께 싸우고 있는 파괴자 신(Sin)은 바로 티더의 아버지이다. 위대한 기사였던 티더의 아버지 젝트는 티더 이전에 신(Sin)을 무찔렀던 전사였다. 세상을 파괴하는 악은 곧 자신의 아버지이고, 그 악을 무찌르고 나면 잠시간의 평화가 찾아오지만 티더 그 자신이 다시 신(Sin)이 되어야만 한다.


파이널 판타지 10의 한 장면


악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티더는 선이었을까. 파이널 판타지 10은 견해가 다르다. 선이 아니라 단지 반악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반악은 대항하던 그 이 사라지면, 다시 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으로 남는다. 그리고 다시 반악을 불러일으킨다. 악-반악-악-반악의 순환구조가 만들어지면 누가 악인지 누가 선인지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 해진다. 우리에겐 간빙기처럼 짧은 평화만 주어진다. 이 구조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악에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악으로 넘쳐나지 않을까, 라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울수는 없다.


한겨레의 칼럼니스트 정희진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에서 악은 악에게 맡기자고 한다. 어차피 악에 대항하는 것도 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제안은 악에 대응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선은 아니라도 반악마저 없다면 이 사회가 악으로 넘쳐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누구나 이런 의구심을 떨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강남에서 있었던 여대생 살인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켜 한동안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수락산 살인사건 역시 여성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것 외에도 더 있다. 특별한 원한관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범죄자들은 "그저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누구라도 악인이 될 수 있고, 아무 이유 없이 또 누구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정희진은 "왜 그랬니?"라는 질문은 의미 없다고 말한다. 정신병력, 과거의 폭행, 가정환경 등 이유가 밝혀진다 해도 "왜 나지?"라는 물음에는 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처는 피해자가 악을 치열하게 사랑하게 만들 뿐이라고. 이 말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위로가 되진 않을 것 같다. 악행을 멈추는 해결책이 되기도 어려울 것 같다. 훌륭한 문제제기지만, 좋은 해결책이라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그럼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미국 TV 시리즈 24의 한 장면


미국 TV시리즈  <24>에 나오는 장면이 하나 떠올랐다. 드라마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데이빗 팔머는 테러로 부상을 입은 후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테러에 굴복해 분노하지 않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적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좌절이 될 것이다.


범죄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성공은 바로 사회 전체가 그들의 범죄에 반응해서 움츠려 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느꼈을 그 분노를 온 사회가 같이 느끼도록 하는 것에서 범죄자는 가장 큰 만족감을 얻는다, 라고 팔머는 말한다. 우리가 악에 반악으로 대응하는 것은 순간의 만족과 안정을 줄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문명을 후퇴시키는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미국이 벌인 수많은 테러와의 전쟁은 정당했다고 말할 수 있을 지언정 정의라 부르기엔 다소 민망하다. 그 이후 폭력은 오히려 더 파괴적이 되었다.


"악과 싸우는 것은 일단은 반악일 뿐 그것이 선은 아니다."


정희진의 말은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밀양>에서 신애(전도연)가 느꼈던 그 분노와 좌절감은 어디서 보상받나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없다. 현실에서는 "강철의 심장, 천둥의 발톱"에 더 기대지 않을까. 그것이 더 정당한 방법이라 생각지 않았을까.


용서, 무관심? 그렇다면 우리의 정의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누구도 답하기 어렵다. 정당한 것이 정의인 것도 아니다. 결국 세상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불완전한 세계에서 완전함은 오히려 트러블메이커이다. 무관심보다는 적극적이고 복수보다는 소극적인 정의가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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