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가와 예술가의 창의력을 드러낸 기후변화
소빙하기란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서늘한 기후가 관측되었던 시기를 말한다. 물론 언제가 소빙하기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서기 1250년 경부터 기온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가장 추웠던 시기는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였고, 1850년경부터는 기온이 점차 상승하기 시작했다.
소빙하기 기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은 오늘날에 비해 1~1.5 ℃ 정도 더 낮았다. 이렇게 낮은 기온은 태양 활동 감소와 함께 화산 분출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알려져있다. 기온이 하강하자 빙하는 성장했고, 나무의 성장은 지체되었다. 가축 전염병이 널리 퍼져 수많은 가축들은 죽어나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마을에서는 추수를 하지 못할 정도의 흉작을 경험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이 시기에 서구에서는 마녀사냥이 시작되었고, 동양에서는 몽고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들어섰다.
소빙하기는 육지에서 얼음판(ice sheet) 더 크게 자랄 만큼 충분히 춥지는 않았기 때문에 빙하기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이 기간 동안 전 세계가 싸늘해진 날씨의 영향을 받았고, 그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최근에서야 이러한 원인이 기후변화에 기인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이 기간 동안 허드슨 만의 얼음이 3주 정도 더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게 관측되었고, 북대서양에서는 평년보다 더 큰 유빙이 관측되었으며 그 수도 훨씬 많았다. 한 때 에스키모 인들의 카누를 영국 해변가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유럽의 산악지역에서는 빙하가 성장하여 산악지역의 마을을 덮쳤고, 긴 겨울과 짧은 여름으로 인해 식량 생산에도 지장을 받았다.
춥고 습한 기후는 질병 발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에서는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의 삼분의 일이 사망했다. 추워진 기후로 인해 농업이 어려워지자 북유럽 농부들은 마을을 버리고 떠나갔고, 긴 겨울 동안 부족한 식량은 나무껍질을 갈아서 빵을 만들어 먹어야 할 만큼 심각한 식량난을 초래했다. 이와 같이 부족한 식량과 가축질병은 북유럽 및 동유럽지역에 심각한 기근을 몰고 왔다.
우리나라도 소빙하기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670년과 1671년에 걸쳐 당시 조선 인구의 20%가 넘는 1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경신(庚辛) 대기근’이 이 시기에 있었다. 이상 저온으로 우박과 서리, 때아닌 폭설이 그칠 줄 모르고 내렸고, 가뭄과 홍수까지 덮쳤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조선 팔도에서는 역병 등 전염병이 유행했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했고, 인육을 먹는 참상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이때는 현종(재위 1659 ~ 1674)이 즉위한 다음 해였는데, "아, 내가 즉위한 이래로 천재가 달마다 생기고, 가뭄과 수해가 서로 잇달아 없는 해가 없어 밤낮으로 걱정하며 편안한 겨를이 없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가뭄이 더욱 참혹하여 봄부터 여름까지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과 보리를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파종도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1670년 5월 2일, 현종), 라는 말로 당시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이 이후도 조선은 소빙하기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695년에는 100만 명이 굶어 죽는 ‘을병대기근’이 찾아왔다.
1815년 4월 역사적인 규모의 탐보라 화산 폭발이 발생했다. 이 영향으로 다음 해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는 6월이 되어도 여름을 느낄 수 없었는 데, 서리 때문에 경작지는 얼어붙고 눈이 산야를 뒤덮었고 나뭇잎은 동해(凍害)로 시커멓게 변했다. 7월과 8월에도 서리가 내려 농작물 수확량은 큰 손실을 입었다. 그해 겨울 곡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옥수수 가격은 두 배, 밀 가격은 다섯 배 이상이나 뛰었다. 유럽 쪽 상황이 더 나빴다. 추운 여름으로 인해 곡물 작황이 나빠지자 프랑스에서 식량은 극소수의 부자들만이 구입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식량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영국에서도 “빵이냐, 피냐”라는 깃발을 든 폭도들이 몽둥이와 창검으로 무장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으며, 아일랜드에서는 기근과 더불어 장티푸스가 번져 그다음 해까지 2년 동안 5만 명이나 기아로 사망했다.
이 여파는 1818~1819년 유럽 대륙에 대규모의 금융 공황과 불황을 몰고 왔다. 이 시기 많은 유럽인들은 기근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를 결정했다. 미국 인구는 1800년 경 530만 명에서 1820년 경에는 960만 명으로 거의 배나 증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 시대는 조선 순조(純祖) 16년에 해당되는 데 극심한 이상기상 현상에 대한 기술은 찾을 수 없었지만, 경상도에서 절량민(絶糧民) 9만여 명에게 구호곡 8천여 섬을 방출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산재는 역설적이게도 오렌지색, 진홍색, 분홍색의 눈부신 석양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빨간색, 파란색, 갈색의 먼지가 섞인 눈을 내리고, 때로는 흙비를 뿌리기도 하였다. 1817년 영국 출신 화가 터너가 그린 ‘카르타고 제국의 몰락’이라는 그림을 보면 노란 안개가 드리워진 인상적인 하늘 풍경과 음침한 색조가 이 시기 하늘 상태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여름이 없는 해로 기록된 1817년은 새로운 창작의 시기 이기도 했다. 부족해진 태양빛으로 작물 생육이 부진해지자 식품 가격이 뛰어올랐다. 말먹이로 사용되던 귀리 가격이 특히 더 비싸졌다. 그때까지 말은 중요한 교통수단 이었으므로 귀리 가격 상승은 곧 교통비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던가. 이러한 교통비 상승은 칼 드레이스(Karl Drais)라는 독일인이 말(馬)없이도 주변을 여행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자극했다. 자전거가 발명된 것이다.
또 한 이러한 우울한 여름 날씨는 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었다. 여름 같지 않은 여름 동안 3명의 영국 작가는 스위스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는 데, 계속 내리는 비와 우울한 하늘로 인해 실내에 발이 묶여 있던 작가들은 춥고 어두웠던 날씨를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표현했다. 마리 셸리(Mary Shelley)는 종종 폭풍우 치 는 배경이 등장하는 공포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섰고, 시인 바이런 경(George G. Byron)은 ‘어둠’이라는 시를 썼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꿈을 꾸었네, 전적으로 꿈만은 아니었네.
밝게 빛나던 태양은 사라져 버렸네."
"I had a dream, which was not all a dream.
The bright sun was extinguish’d.”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기상학과 한스 뉴버거(Hans Neuberger) 교수는 새로운 각도로 소빙하기에 대한 증거를 수집했다. 그는 1400부터 1967년 사이에 그려진 그림 중 미국과 유럽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회화 12,000점에서 구름과 어둠이 나타나는 빈도를 분석했다. 1970년에 발표된 연구결과에서 구름과 어둠이 등장하는 그림이 소빙하기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특히나 1600~1649년 사이 회화에서 구름과 어둠이 가장 많이 나타났다. 우울한 날씨는 예술가들에게도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